1내가 다시 해 아래에서 행하는 모든 학대를 살펴 보았도다 보라 학대 받는 자들의 눈물이로다 그들에게 위로자가 없도다 그들을 학대하는 자들의 손에는 권세가 있으나 그들에게는 위로자가 없도다
전도서 4장 1절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내가 다시 해 아래에서 행하는 모든 학대를 살펴보았도다." 여러분, 이 문장에서 가장 중요한 말이 무엇이겠습니까? 바로 '보았다'는 말입니다.
전도자는 책상에 앉아 철학이나 연구하고 탁상공론을 일삼는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오늘 본문은 그를 이렇게 소개합니다. 그는 세상을 두 눈으로 똑똑히 '본' 사람입니다. 세상을 관찰했고, 권력들이 행하는 짓을 보았고, 강한 자가 약한 자를 짓누르고 학대하는 것을 보았고, 그 학대받는 약한 자들이 소리 없이 흘리는 눈물을 보았습니다. 그런데 그들에게는 위로자 하나 없더라는 것까지 다 보았습니다.
그렇게 세상에 벌어지는 학대하는 자와 학대받는 자를 지켜보던 전도자는 너무나 괴로운 나머지 이렇게 탄식합니다. 차라리 태어나지 않은 자가 더 복되다고 말입니다.
전도서 4:2-32그러므로 나는 아직 살아 있는 산 자들보다 죽은 지 오랜 죽은 자들을 더 복되다 하였으며
3이 둘보다도 아직 출생하지 아니하여 해 아래에서 행하는 악한 일을 보지 못한 자가 더 복되다 하였노라
이 땅에 학대가 참 많지 않습니까? 그런데 이 학대는 왜 근절되지 않을까요? 학대가 나쁜 것임을 누구나 다 아는데, 아무리 애를 써도 사라지지 않는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이유는 뼈아픕니다. 그 학대를 해결할 수 있는 힘 있는 자들이, 바로 그 학대의 주범이기 때문입니다. 학대를 없앨 수 있는 권력을 가진 이가 정작 학대의 주범이니, 이 세상에서 학대가 사라질 리가 없습니다. 전도자는 바로 이 끝없는 굴레를 보며 몹시도 고통스러워했습니다.
보통 학대는 아주 그럴듯한 이름표를 달고 나타납니다.
학대는 이런 이름표를 주렁주렁 달고 와서 스스로를 교묘하게 합리화합니다. "다 너를 위해서 그러는 거야. 훈련시키는 거야. 교정해 주는 거야. 이건 다 사랑의 채찍이야."
학대는 늘 이렇게 선량한 얼굴을 하고 찾아옵니다.
그런데 이 잔인한 굴레를 멈추게 할 수 있는 원동력이 딱 하나 있습니다. 학대를 일삼는 자가 스스로 멈추게 되는 유일한 길은, 자신이 얼마나 악한 존재인지를 깨닫는 '자각'입니다. '아, 내가 악한 자였구나. 내가 환자였구나. 내가 진짜 죄인이었구나.' 이 처절한 자각만이 비로소 손에 쥔 채찍을 내려놓게 만듭니다.
학대에게는 쌍둥이 동생이 하나 있습니다. 그 이름은 '위협'입니다. 그렇다면 학대와 위협의 차이는 무엇일까요?
학대가 겉으로 드러난 폭력이라면, 위협은 보이지 않게 숨어 있는 폭력입니다.
위협은 날 선 칼을 들이대지 않습니다. 하지만 영혼의 숨통을 서서히 조여 오는 데는 아주 귀신같습니다.
직장이든, 가정이든, 교회든 사람이 모이는 곳에 가만히 있다 보면 왠지 묘한 긴장감이 흐를 때가 있습니다. '내가 반대하면 불이익이 오지 않을까?', '질문했다간 찍히지 않을까?' 침묵하지 않으면 손해를 볼 것 같고, 끊임없이 눈치를 보아야만 할 것 같은 묘한 공기. 만약 여러분이 몸담은 곳에 그런 기류가 흐르고 있다면, 거기에는 어김없이 학대의 동생인 '위협'이 은밀하게 활동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날 가정만큼 이 위협이 판치는 곳이 또 있을까요? 가정에서의 위협은 대개 "사랑과 보호"라는 가장 안전한 가면을 쓰고 찾아옵니다.
남편들은 주로 '가장'이라는 권위의 방패를 무기로 씁니다. 아내가 가정을 위해 조심스럽게 의견을 내면, 남편은 보호를 핑계 대며 아내의 입을 틀어막습니다. "당신이 뭘 안다고 그래? 가만히 있어. 다 우리 집 잘되라고, 당신 편하라고 내가 알아서 하는 소리야." 이것은 든든한 책임감이 아닙니다. 아내의 판단력을 믿지 못하고, 내 입맛대로 통제하기 위해 상대를 무력화시키는 교묘한 위협입니다.
반면, 아내들은 '한탄과 포기'라는 날카로운 칼을 씁니다. 남편이 기대에 미치지 못할 때, 아내들은 차갑게 돌아서며 남편의 존재 가치를 송두리째 무너뜨립니다. "당신한테 기대를 한 내가 바보지. 됐어, 더는 말하지 말자." 여러분, 이게 단순한 넋두리나 하소연인 줄 아십니까? 아주 교묘한 '위협질'입니다. "너는 대화할 가치조차 없는 무능한 존재"라며 남편에게 낙인을 찍고 정서적으로 처벌하는 것입니다.
이 은밀한 숨막힘 속에서, 남편은 아내 앞에서 한없이 쪼그라들고 아내는 남편 밑에서 숨이 턱턱 막힙니다. 서로를 향해 소리를 지르거나 폭력을 휘두르지 않았을 뿐, 보이지 않는 정서적 가스라이팅으로 상대의 영혼을 끊임없이 사냥하고 있는 것입니다. 저는 목회하면서 이 위협에 기가 죽어 영혼이 상해버린 부부들을 수없이 보았습니다.
교회를 개척하던 시절, 어떤 집사님에게 조심스레 교회 사역을 하나 부탁드렸습니다. "집사님, 이 일을 좀 맡아주시면 어떨까요?" 그러자 그분이 아주 차분하고 건조한 어조로 대답하더군요. "목사님, 저는 잘하는 게 하나도 없어서요. 앞으로도 저한테는 아무것도 부탁하지 마세요."
저는 그 부드러운 말 속에서 엄청난 위협을 느꼈습니다. 저에게는 그 말이 이렇게 들렸기 때문입니다. '나 귀찮게 건드리면, 나 이 교회 안 나올 겁니다.' 결국 저는 그분에게 아무것도 부탁하지 못했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그분은 교회에서 보이지 않았습니다.
세상을 가만히 들여다보십시오. 강한 자들은 억압과 명령으로 위협하고, 약한 자들은 수동적 공격과 피해의식으로 끊임없이 위협합니다. 정의라는 이름으로 위협하고, 상처받았다는 핑계로 위협하고, 서운함과 삐침이라는 무기로 상대방의 목을 죕니다. 어떤 이는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오직 냉랭한 침묵 하나만으로 온 공동체의 분위기를 얼어붙게 만듭니다. 그 침묵의 위협이 얼마나 무서운지 모릅니다.
저는 이 일상의 위협들이 '작은 살인'과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몸의 피를 흘리게 하지는 않지만, 상대의 영혼과 존재를 매일 뾰족한 바늘로 찔러 천천히 말라 죽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전도자는 이어서, 우리가 애써 수고하고 성취한 뒤에 찾아오는 '시기'의 문제를 들고 나옵니다.
전도서 4장 4절 말씀입니다.
전도서 4:44내가 또 본즉 사람이 모든 수고와 모든 재주로 말미암아 이웃에게 시기를 받으니 이것도 헛되어 바람을 잡는 것이로다
자기가 애써 이룬 업적 때문에, 남에게 없는 탁월함 때문에, 도리어 이웃에게 '시기'를 받게 되더라는 것입니다. 내가 잘난 것이 누군가에게는 아픔이 되고 '시기'가 되는 서글픈 광경을, 전도자는 똑똑히 보았습니다.
여러분, 인류 문명이 어디서 시작된 줄 아십니까? 놀랍게도 인류 문명은 '시기'로부터 출발했습니다. 동생을 '시기'한 형의 마음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아벨이 하나님께 칭찬을 받자, 형 가인의 마음에 '시기'하는 마음이 불일듯 일어났습니다. 그리고 그 '시기'가 결국 무엇으로 이어졌습니까? 인류 최초의 살인으로 이어지지 않았습니까. 그렇게 '시기'와 살인이 인류의 DNA처럼 유전되면서, 문명의 역사 속에 어두운 그늘이 드리우기 시작한 것입니다.
'시기'는 늘 우리 귀에 대고 이렇게 속삭입니다. "저 사람 때문에 내가 작아 보이는 거야." "저 사람만 없었으면, 내가 이 모양 이 꼴로 살진 않았을 텐데."
'시기'는 타인의 칭찬을 나의 '박탈감'으로 느끼게 만들고, 타인의 성공을 나의 '실패'처럼 여기게 만드는 지독한 착각입니다. 그래서 '시기'하는 마음이 깊은 사람은 늘 누군가를 의식하며 살 수밖에 없고, 그 마음은 단 한 순간도 평안을 누리지 못하는 전쟁터가 되고 맙니다.
성경에서 '시기'하면 떠오르는 대표적인 인물이 있습니다. 바로 이스라엘의 첫 번째 왕, 사울입니다. 그는 평생 다윗을 '시기'하며 인생을 허비했습니다. 다윗을 너무나 '시기'한 나머지 제 손에 피는 묻히기 싫고, 그를 죽이고는 싶어서 블레셋과의 사지로 내몰았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다윗을 죽이려고 보낸 그 전쟁터보다, 정작 사울 자신의 마음이라는 전쟁터가 훨씬 더 비참하고 치열하게 망가져 가고 있었습니다.
'시기'는 당하는 사람도 괴롭지만, 실은 '시기'를 품고 있는 사람이 두 배, 세 배는 더 괴롭습니다. '시기'의 칼날은 밖을 향하는 것 같지만, 결국 가장 먼저 자기 자신의 영혼부터 난도질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시기'하는 사람이 가장 먼저 병들고 가장 빨리 무너집니다. 그런 마음 상태로는 아무리 좋은 보약을 먹고 몸에 좋은 것을 채워 넣어도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저는 가끔 이 '시기'가 발가락에 생긴 '무좀' 같다는 생각을 합니다.
무좀에 걸리면 발가락 사이가 미칠 듯이 가렵습니다. 보기에도 흉하지만, 가려움을 참지 못해 자꾸 손을 대어 긁게 됩니다. 긁을 때는 순간적으로 짜릿하고 시원합니다. 하지만 계속 긁으면 어떻게 됩니까? 피가 나고, 고름이 흐르고, 살이 벗겨집니다. 결국 상처가 덧나서 내 몸을 완전히 망가뜨리고 맙니다.
'시기'가 꼭 이와 같습니다. 말초신경을 자극하는 묘한 쾌감이 있으니까 자꾸만 남과 비교하고 '시기'하지만, 실상은 내 영혼을 스스로 갉아먹는 파멸의 짓입니다.
우리가 남을 헐뜯는 '뒷담화'를 왜 하겠습니까? 무좀을 박박 긁을 때처럼, 그 순간만큼은 속이 시원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기억하십시오. 그것 역시 내 영혼을 피 흘리게 하고, 나를 송두리째 망가뜨리는 영적 자해 행위일 뿐입니다.
여러분, '게으름'과 '나태'도 이와 똑같습니다.
전도서 4장 5절 말씀입니다.
전도서 4:55우매자는 팔짱을 끼고 있으면서 자기의 몸만 축내는도다
사람들은 왜 '나태'할까요? 자기가 편하고 싶어서 그렇습니다. 하지만 '나태'는 편안함을 주는 것 같아 보여도, 실상은 자기 자신을 서서히 파괴하는 무서운 독소입니다. 그것도 모른 채, 수많은 사람이 나태함 속에서 자기 인생을 허비하고 소진하며 살아갑니다.
우리가 볼 때 '시기'와 '나태'는 완전히 반대되는 모습처럼 보입니다. '시기'하는 사람은 몹시 악해 보이고, '나태'한 사람은 그저 조금 게으를 뿐, 그보다는 욕을 덜 먹는 경향이 있지 않습니까?
그러나 사실, 이 둘은 같은 뿌리에서 태어난 '같은 자매'입니다. 한 뿌리에서 나와 열매만 다르게 맺혔을 뿐입니다.
결국 둘 다 '불안'이 낳은 자식들입니다. '불안'이라는 한 부모가 '나태'도 낳고, '시기'도 낳은 것입니다. 다만 '시기'는 남과의 '비교'에 자극을 받아 날뛰는 것이고, '나태'는 그 '비교'에 완전히 지쳐서 숨어버리는 것뿐입니다. 그 차이만 있을 뿐, 결국 두 가지 모두 남과 나를 끝없이 비교하는 병든 마음에서 시작됩니다. 하나님이 보실 때는 둘 다 바람을 잡으려는 헛된 몸부림일 뿐입니다.

전도자는 이어서, 고립된 성공이 얼마나 허무한지를 보여주기 위해 한 사람을 무대 위로 등장시킵니다.
전도서 4장 8절 말씀입니다.
전도서 4:88어떤 사람은 아들도 없고 형제도 없이 홀로 있으나 그의 모든 수고에는 끝이 없도다 또 비록 그의 눈은 부요를 족하게 여기지 아니하면서 이르기를 내가 누구를 위하여는 이같이 수고하고 나를 위하여는 행복을 누리지 못하게 하는가 하여도 이것도 헛되어 불행한 노고로다
이 사람은 아마도 어려서부터 이를 악물고 다짐하며 살았을 것입니다. "나는 반드시 성공할 거야." "남들이 우러러보는 자리에 올라갈 거야." "절대로 뒤처지지 않을 거야."
그래서 남들보다 가장 일찍 출근하고 가장 늦게 퇴근했습니다. 쉬는 날도, 공휴일도 없이 오직 일만 붙들고 살았습니다. 그렇게 뼈를 깎는 노력 끝에 마침내 성공을 거두었고, 어마어마한 부를 쌓았습니다.
그런데 전도자가 그 인생을 가만히 들여다보니, 그 얼굴에 웃음이 없습니다. 성공은 거머쥐었는데, 기쁨이 없습니다. 그 엄청난 성공을 함께 축하해 주고 나눌 사람도 곁에 단 한 명 남아있지 않습니다. 전도자는 이 사람의 화려한 성공과 업적을 향해 단 한마디로 이렇게 정의합니다. 바로, '불행한 노고'라고 말입니다.
누구보다 땀 흘려 수고했지만 '누림'이 없었고, 누구보다 열심히 일했지만 '기쁨'이 없었으며, 누구보다 많은 것을 가졌지만 그 마음을 따뜻하게 나눌 사람이 단 한 명도 없는 고독한 인생이 된 것입니다.

우리 역시 살면서 스스로에게 이렇게 속삭이며 달릴 때가 많지 않습니까? "조금만 더, 조금만 더 벌면 그때는 괜찮아질 거야." 직장인은 "이번에 승진만 하면 숨통이 트일 것 같다" 하고, 주부는 "우리 아이 대학만 보내놓으면 여유가 생기겠지" 합니다. "내 집 마련만 하면 안정을 찾을 거야", "이번 프로젝트만 끝나면 다 달라질 거야" 하며 스스로를 채찍질합니다. 은퇴하면 여행이나 원 없이 다닐 거라고 근사한 계획을 세워두신 분들도 참 많습니다.
그런데 목회자로서 제가 그런 분들의 삶 속에서 목격한 것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돈을 더 벌었는데도, 여전히 더 벌어야 할 것 같아 불안해합니다. 승진의 기쁨은 고작 하루 이틀뿐, 이내 더 높은 자리를 올려다보며 초조해합니다. 꿈에 그리던 집을 샀는데, 이웃이 더 크고 좋은 집을 샀다는 말을 듣는 순간, 집을 얻은 기쁨은 신기루처럼 사라지고 더 큰 평수를 향해 또다시 몸부림칩니다. 그러다 막상 은퇴할 때가 되면 덜컥 병이 들어버립니다. 평생 몸 바쳐 모은 돈은 병원비로 다 들어가고, 남은 재산은 자식들이 서로 가지겠다고 싸웁니다. 여러분, 이것이 대체 무슨 허무한 일입니까?
우리 현대인들은 맹렬하게 '달리는 법'만 배웠지, 멈추어 서는 '안식의 법'을 배운 적이 없습니다. 멈출 줄을 모르니, 하루 종일 녹초가 되도록 일하고 집에 돌아와서도 진짜 쉴 줄을 모릅니다.
집에 와서 쉰다는 것이 고작 스마트폰으로 SNS를 들여다보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마저 휴식이 아닙니다. 남들은 어떻게 사나, 남들이 이뤄낸 성취를 훔쳐보며 '나도 어떻게 하면 더 달려볼까' 머리를 굴리는 또 다른 재테크이자 정신적 노동일 뿐입니다.
우리는 흔히 "내 아이를 위해 열심히 산다"고 말하지만, 정작 아이와 눈을 맞추며 함께 보내는 시간은 없습니다. "가족을 위해 이토록 고생한다"고 말하지만, 정작 소중한 가족들과 식탁에 마주 앉아 도란도란 따뜻한 대화 한 마디 나눌 줄을 모릅니다.
얼마 전, 우리 교회의 어느 집사님과 차 한잔 나누며 이런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우리가 비록 경제적으로는 이 나라를 일으켜 세우는 데 기여한 세대였을지는 몰라도, 정작 우리의 가장 소중한 자식들은 외롭고 엉망으로 키운 세대일지도 모른다고, 돈 버는 데만 너무 급급하느라 정작 자식들을 가장 외롭게 방치하며 키워낸 세대가 바로 우리인 것 같다고 말입니다. 서로 마주 앉아 참 뼈아픈 반성을 나누었습니다.
우리의 모습을 보면, 행복해지려고 그토록 처절하게 수고하는데, 정작 그 수고 때문에 전혀 행복하지 못한 '아이러니한 삶'을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저는 솔직히 '열심히 일한다'는 말은 이해가 되지만, '열심히 산다'는 말은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대체 열심히 사는 게 무엇입니까? 기쁨도 없고, 평안도 없고, 관계도 다 깨어지는데 그저 달리기만 하는 것이 열심히 사는 것입니까?
이 세상의 실상이 바로 이렇습니다. 우리가 이룬 성공과 업적의 화려한 겉모습 아래에는, 수많은 '학대'와 '시기', 그리고 '불행한 노고'가 거미줄처럼 복잡하게 얽혀 있습니다. 거미줄 같아서, 한 줄을 끊어내면 다른 줄이 팽팽하게 당겨지고, 한 가지 문제를 해결하면 또 다른 긴장과 갈등이 순식간에 찾아옵니다.
힘 있는 자는 힘을 가질수록 약한 자를 더 모질게 누르고, '비교'는 끊임없이 사람들의 마음을 찢어 놓으며, 애써 이룬 성취는 오히려 나를 세상으로부터 더 깊이 고립시킵니다. 남부러울 것 없는 성취를 이루고 어느 날 문득 뒤를 돌아보니, 내 곁엔 아무도 없습니다. 그저 외로운 고립된 섬처럼, 나 혼자 덩그러니 남겨져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비극적인 구조는, 어느 개인의 나약함 때문에 생긴 문제가 아닙니다. 이 타락한 세상이 교묘하게 만들어 놓은 질서이자 굴레인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전도자는 이 부조리한 세상 속에 던져진 우리에게 그냥 알아서 버텨보라고 방치하지 않습니다. 반드시 이 어두운 현실을 돌파할 '해답'을 제시합니다. 성경이 참으로 위대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이토록 뼈아픈 세상을 폭로했다면, 반드시 그 세상을 살아낼 수 있는 '해답'도 함께 주는 법입니다.
전도자가 마침내 찾아낸 '해답'은, 더 많은 소유나 권력, 혹은 더 거대한 성공이 아니었습니다.
전도서 4장 9절에서 12절 말씀입니다.
전도서 4:9-129두 사람이 한 사람보다 나음은 그들이 수고함으로 좋은 상을 얻을 것임이라
10혹시 그들이 넘어지면 하나가 그 동무를 붙들어 일으키려니와 홀로 있어 넘어지고 붙들어 일으킬 자가 없는 자에게는 화가 있으리라
11또 두 사람이 함께 누우면 따뜻하거니와 한 사람이면 어찌 따뜻하랴
12한 사람이면 패하겠거니와 두 사람이면 맞설 수 있나니 세 겹 줄은 쉽게 끊어지지 아니하느니라

전도자가 찾아낸 진짜 '해답'은, 바로 '사람' 안에 있었습니다.
데살로니가전서 2장에서 사도 바울은 성도들을 향해 참으로 놀라운 선포를 합니다.
데살로니가전서 2장 19절 말씀입니다.
데살로니가전서 2:1919우리의 소망이나 기쁨이나 자랑의 면류관이 무엇이냐 그가 강림하실 때 우리 주 예수 앞에 너희가 아니냐
바로 여러분이, 우리 주 예수께서 오시는 그날에 우리의 영광스러운 '면류관'이라는 고백입니다. 갈라디아 교회 성도들을 향해서는 "너희가 나의 추천서"라고 고백했는데, 이 역시 같은 맥락의 말씀입니다.
세상 기준으로 보면, 운동선수에게 '면류관'은 우승 트로피나 금메달일 것입니다. 직장인에게는 남들보다 빠른 승진이 '면류관'이겠지요. 사업가에게는 매출 전표가 '면류관'이고, 부모에게는 자식의 번듯한 성공이 세상 가장 빛나는 '면류관'일 것입니다. 어쩌면 저 같은 목회자에게는 성도의 숫자나 예배당의 크기가 은연중에 '면류관'처럼 여겨질지도 모르겠습니다. 실제로 성도가 많고 예배당이 웅장한 대형 교회 목사님들은 어딜 가나 어깨가 당당하고 목소리에 힘이 들어갑니다. 하지만 우리처럼 평범한 목회자들은 노회나 회의 자리에 가면 의견 한 번 내는 것도 조심스럽고 주저하게 됩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은 고작 그런 것들이 아니라, 바로 '사람'이 나의 '면류관'이라고 선언합니다. 우리가 언젠가 하나님 보좌 앞에 서는 그날, 우리는 마침내 한 가지 진실을 똑똑히 깨닫게 될 것입니다. 내가 세상에서 이룩한 찬란한 '업적'도 아니고, 밤낮 수고해서 통장에 쌓아둔 돈도 아니고, 내 힘으로 키워낸 예배당 건물도 아니라, 오직 내 곁을 지키며 함께 울고 웃었던 '그 한 '사람''이 나의 가장 영광스러운 '면류관'이었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그저 어쩌다 우연히 만나 같은 예배당 의자에 앉아 있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지금 내 옆에서, 내 앞에서 나와 함께 예배하고 있는 그 '사람'은, 하나님께서 내 평생에 맡겨주신 가장 값진 '면류관'입니다.
내 남편도, 내 아내도 결코 내 소유물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눈에는 내 배우자가 바로 나에게 주신 가장 소중한 '면류관'입니다. 그러므로 내 배우자가 지금 내 곁에서 행복해하는지, 아니면 눈물 흘리며 외로워하는지를 가만히 들여다보십시오. 그것이 바로 지금 내 영적인 '면류관'이 어떤 상태인지를 고스란히 보여주는 거울이기 때문입니다.
내 옆 사람의 신앙이 일 년 전보다 깊어졌다면, 그 자라남의 배경에는 내가 그동안 흘려보냈던 복음의 가치와 말씀, 그리고 따뜻한 '사랑'이 녹아 있을 것입니다. 내 앞에 있는 그 사람의 거칠던 인격이 한 달 전보다 부드러워졌다면, 거기에는 내가 묵묵히 참고 기다려 준 '인내'와 그를 이해하기 위해 가슴 졸이며 몸부림쳤던 마음이 고스란히 담겨 있을 것입니다.
그 사람의 얼굴에 이전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평안함이 깃들었다면, 그 평안의 밑바탕에는 그를 포기하지 않고 눈물로 제단을 적셨던 나의 소리 없는 '기도'가 든든히 버티고 있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가 내 앞에서 비로소 환하게 미소 지을 수 있다면, 그 '미소'는 내가 그에게 끊임없이 심어주었던 칭찬과 격려의 씨앗이 마침내 아름답게 꽃을 피워 나에게로 되돌아온 선물일 것입니다.
반대로, 우리 자신도 마찬가지입니다. 내가 사정없이 무너질 수밖에 없었던 절망의 한복판에서 용케 쓰러지지 않고 버텨냈던 수많은 날들을 돌아보십시오. 그 뒤에는, 내가 알지도 못하는 순간에 나를 위해 간절히 눈물 흘렸던 누군가의 숨은 중보'기도'가 있었습니다. 내가 다 포기하고 싶었던 차가운 시간 속에서도 끝내 견뎌낼 수 있었던 것은, 그가 보내준 따뜻한 눈빛과 한 자락의 '미소', 그리고 나를 품어주었던 조건 없는 선함과 용납이 내 영혼 깊숙이 들어와 버팀목이 되어주었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기독교' 신앙은 결코 홀로 자라나지 않습니다. 성부, 성자, 성령 삼위일체 하나님께서 온전한 관계 속에서 서로를 채우시듯, 우리 역시 골방에 홀로 앉아 성경책 열심히 읽고 기도 많이 한다고 해서 믿음이 자라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같이, 함께, 그리고 더불어 부대끼며 자라갑니다. 누군가의 '사랑', 누군가의 눈물 어린 '기도', 누군가의 묵묵한 '인내', 누군가의 따뜻한 '미소'와 건네준 말 한마디를 영양분 삼아, 우리는 지금 이 순간에도 서로를 기대며 함께 자라가고 있는 것입니다.

내 곁에 있는 이 '사람'을 나의 가장 영광스러운 '면류관'으로 바라보는 이 '복음의 눈'을 가질 수만 있다면, 우리의 삶에는 타인을 향한 '시기'나 스스로를 파괴하는 '나태'가 감히 발붙일 틈이 없습니다. 내 옆의 '사람'을 그런 눈으로 바라보는데, 그의 성공이 어떻게 나에게 '시기'가 되겠습니까? 오히려 진심 어린 축하와 기쁨이 되지 않겠습니까? 그의 잘됨이 박탈감으로 다가오는 것이 아니라, 나의 커다란 자랑이 될 것입니다. 그의 빛나는 모습이 내 초라함에 대한 억울함이 아니라, 주 안에서 나의 가장 큰 영광이 되는 것입니다.
만약 우리가 여전히 내 자식의 앞길, 오직 나 자신의 안위에만 갇혀 살아가고 있다면, 죄송하지만 우리는 아직 '기독교'가 무엇인지 전혀 모르는 사람들입니다. 내 자식 잘되고, 나만 무탈하게 잘 먹고 잘살다가, 내가 원하는 소원 성취하고 죽어서 천국에 간다? 여러분,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아니라, 한갓 샤머니즘에 불과할 뿐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이와 똑같은 비밀을 말씀하셨습니다.
마태복음 6장 19절에서 20절 말씀입니다.
마태복음 6:19-2019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땅에 쌓아 두지 말라 거기는 좀과 동록이 해하며 도둑이 구멍을 뚫고 도둑질하느니라
20오직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하늘에 쌓아 두라 거기는 좀이나 동록이 해하지 못하며 도둑이 구멍을 뚫지도 못하고 도둑질도 못하느니라
이 말씀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주님은 지금 우리가 바쳐야 할 보물의 '양'을 말씀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보물을 쌓아 두어야 할 '위치'를 말씀하고 계십니다. 우리는 자꾸 물질에 몰입되어 양으로만 계산하려 하지만, 주님이 정작 중요하게 여기신 것은 이 보물을 대체 '어디에 두느냐' 하는 위치였습니다. 그러면서 친절하게 그 안전한 주소를 일러 주십니다. 땅에 쌓아 두지 말고, '하늘'에 쌓아 두어라.
그렇다면 '하늘'에 보물을 쌓아 둔다는 것이 대체 무슨 뜻이겠습니까? 세상 은행도 가장 안전한 곳을 골라 예금하듯이, 우리의 가장 소중한 인생의 보물을 대체 어느 은행에 맡기라는 뜻일까요?
저는 이 '하늘' 은행이 어디에 있는지 오랫동안 깊이 고민하며 기도해 보았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이런 결론에 도달했습니다. 주님이 말씀하신 그 '하늘'은, 저 푸른 우주 공간 너머에 있는 아득한 공간이 아니었습니다.
돈은 아무리 남겨봐야 내가 떠나고 나면 누가 가져갈지 모릅니다. 내가 살아생전 이웃과 주를 위해 기쁘게 '쓴 것'까지만 진짜 내 것이지, 쥐고 가려 해봐야 두고 가면 그만입니다. 요즘 평생을 바쳐 건물을 사 모으는 분들도 계시는데, 그 화려한 건물들이 백 년 뒤에도 고스란히 남아 있겠습니까? 그저 무너진 옛 터가 되어버리지 않겠습니까.
눈에 보이는 세상 모든 것은 시간이 흐르면 결국 신기루처럼 사라집니다. 책에 이름을 깊이 새겨 위대한 기록을 남겨본들, 그 기록마저 세월의 강물 앞에서는 흔적도 없이 잊히고 맙니다.

그렇다면 영원히 사라지지 않고 이 땅에 남는 것은 대체 무엇이겠습니까? 오직 '사람' 안에 차곡차곡 쌓아 둔 것뿐입니다. 그 '사람'에게 진심으로 잘한 것, 그 '사람'의 영혼을 위해 흘려보낸 것만 영원히 남습니다.
저는 요즘 젊은 사람들이 반려동물에게 정성을 쏟는 모습을 보면서, '아, 저 마음을 똑같이 '사람'에게만 쏟아도 하늘의 큰 복을 받겠구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 따뜻한 사랑의 마음을 오직 '사람'에게 흘려보낸다면, 그 가문은 자손 대대로 하나님의 복을 누릴 것입니다. 왜냐하면 '사람'의 마음이야말로, 그 어떤 좀도 동록도 감히 해할 수 없는 하나님의 영원한 보물 창고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사람'에게 건넨 따뜻한 미소, '사람'의 영혼 속에 심어놓은 선함과 격려의 말 한마디, 그 영혼을 위해 골방에서 무릎 꿇고 흘린 눈물, 그에게 아낌없이 나누어 준 나의 시간과 관심과 재정. 그것만큼은 그 '사람'의 영혼 속에 고스란히 남아 영원부터 영원까지 흘러갑니다.
저는 오늘 선포하는 이 설교 역시, 여기서 그냥 공중에 흩어지며 끝난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이 생명의 말씀은 오늘 예배를 드리는 여러분의 입술을 통해, 그리고 여러분의 따뜻한 마음을 통해 또다시 누군가에게로 흘러갈 것입니다.
얼마 전, 우리 교회의 어느 성도님께서 제게 이런 고백을 전해 주셨습니다. 일터에서 어떤 고객을 만나 대화를 나누는데, 자기도 모르게 입에서 흘러나오는 모든 위로와 격려의 말들이 알고 보니 전부 예전에 목사님이 강단에서 선포하셨던 설교 말씀이더라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내가 누군가에게 눈물로 건넨 씨앗은 그렇게 보이지 않는 생명의 줄기를 타고 흘러갑니다.
우리의 모든 보물은, 오직 '사람' 안에 담아 둔 것만 영원히 남습니다. 그리고 그 '사람'은 내가 흘려보낸 보물을 또 다른 '사람'에게 전하고, 그 '사람'은 또 다른 영혼에게 전하며, 보이지 않는 하늘의 네트워크를 타고 결국 영원까지 이어집니다. 오직 그것만 주님 앞에 남는 것입니다.
그러니 여러분, 오늘 예배를 마치고 돌아가시는 길에 엘리베이터에서 이웃을 만나거든, 가벼운 미소라도 아낌없이 지어 보내십시오. 그 작은 미소가 또 다른 누군가에게 살아갈 소망으로 증거되고 이어져, 마침내 하나님 나라에서 우리의 가장 영광스러운 '면류관'이 되어 우리에게 되돌아올 것입니다.
제가 정말로 사랑하는 시가 한 편 있습니다. 얼마나 아끼는지, 교회를 처음 개척했을 때 성도님들이 오며 가며 늘 마음 깊이 읽으시라고 예배당 뒤편 가장 잘 보이는 곳에 붙여 두었을 정도입니다. 정현종 시인의 「모든 순간이 꽃봉오리인 것을」이라는 시입니다.
나는 가끔 후회한다
그때 그 일이
노다지였을지도 모르는데……
그때 그 사람이
그때 그 물건이
노다지였을지도 모르는데……
더 열심히 파고들고
더 열심히 말을 걸고
더 열심히 귀 기울이고
더 열심히 사랑할걸……
반벙어리처럼
귀머거리처럼
보내지는 않았는가
우두커니처럼……
더 열심히 그 순간을
사랑할 것을……
모든 순간이 다아
꽃봉오리인 것을,
내 열심에 따라 피어날
꽃봉오리인 것을!
정현종, 「모든 순간이 꽃봉오리인 것을」
저는 이 아름다운 시 구절 중에서도 특히 이 한 문장이 가슴 깊이 파고듭니다. 그때 그 사람이 노다지인 것을. 그때 그 사람이 내 인생을 활짝 꽃피울 소중한 꽃봉오리인 것을.
시인은 바로 내 곁에 숨 쉬고 있던 그 '사람'이 진짜 '노다지'였으며, 내 쓸쓸한 인생을 아름답게 꽃피워 줄 꽃봉오리였다고 절절하게 노래합니다. 하지만 정작 그 순간에는 그것을 미처 깨닫지 못했다며, 시의 첫 구절을 이렇게 뼈아픈 탄식으로 시작합니다. 나는 후회한다.
인생을 다 살아보니 비로소 알겠더라는 것입니다. 내 앞에 서 있던 보잘것없어 보이던 그 '사람'이 내 평생의 가장 눈부신 '노다지'였는데, 내 어두운 삶을 환하게 꽃피울 꽃봉오리였는데, 그때 더 열심히 말을 걸어주고, 더 귀 기울여 들어주고, 더 뜨겁게 사랑했어야 했다는 깊은 후회입니다. 그 회한의 고백을 바닥에 깔고 시가 흐르고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전도서 4장이 오늘 우리에게 전하고자 하는 핵심 메시지가 바로 이 이야기입니다.
세상이 아니라, '사람'이 진짜 '노다지'입니다. 지금 내 곁에 있는 그 '사람'이 당신의 메마른 인생을 꽃피울 가장 눈부신 꽃봉오리입니다. 그런데 어리석은 우리 인간들은 욕망에 눈이 멀어 그 아름다운 꽃봉오리를 제 손으로 무참히 꺾어버리고, 그 신성한 '노다지'를 더러운 흙탕물로 덮어버립니다. 내 곁에 주신 그 소중한 존재들을 향해 '학대'하고, '시기'하며, 보이지 않는 두꺼운 벽을 쌓아 거리를 둡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이 예비하신 가장 찬란한 복을 제 발로 다 걷어차 버리는 것입니다. 전도자는 이 가슴 아픈 모습을 바라보며, 이것 역시 바람을 잡으려는 가장 헛된 짓이라고 경고합니다. 이 엄중한 영적 진실을 깨닫는다면, 여러분은 오늘 전도서 4장의 말씀을 온전히 이해하신 것입니다.
오늘 선포된 말씀을 정리하겠습니다.
지금 여러분의 바로 옆에, 바로 앞에 앉아 계신 그 '사람', 하나님께서 이 수많은 교회 중에서 특별히 우리 교회 안에서 만나게 하신 그 소중한 '사람'은, 한 사람도 예외 없이 장차 하나님 나라에서 여러분이 쓰게 될 영광스러운 '면류관'입니다.
그리고 그 '사람'의 영혼 속에 눈물로 보낸 여러분의 '사랑', 그 영혼을 품기 위해 기꺼이 쏟아부은 아까운 시간들, 그 영혼을 제단에 올려놓고 애끓게 드렸던 중보'기도'는, 단 하나도 공중에 사라지지 않고 여러분의 영혼과 인생 속에 가장 아름다운 꽃봉오리로 마침내 피어나게 될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 비밀을 미리 알았던 선각자였습니다. '사람'이 진짜 내 인생의 '노다지'였다는 것을, '사람'이 내 삶을 증명해 줄 가장 눈부신 꽃봉오리였다는 것을 똑똑히 깨닫게 하셨기에, 자신의 모든 신앙 고백을 담아 영혼들을 향해 기꺼이 나의 '면류관'이라고 고백했던 것입니다. 시인의 언어와 사도의 고백이 겉모습만 다를 뿐, 그 알맹이에 담겨 있는 영적인 진리는 완벽하게 일치합니다.
모든 '사람' 안에 인생의 진짜 '해답'이 있습니다. 모든 '사람' 안에 하나님이 예비하신 복이 숨겨져 있으며, 그 깨어진 관계의 회복 속에 하나님의 선하신 뜻이 들어있습니다. 오직 그 '사람'과의 깊고 따뜻한 연합 속에서만,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 인생에 약속하신 하늘의 모든 풍요로움을 비로소 누릴 수 있는 것입니다.
저는 오늘 여러분에게 전해드린 이 설교가, 여러분의 삶에 배달된 한 덩이 '노다지'였으면 좋겠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오직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구원하시기 위해 저 참혹한 십자가의 길을 묵묵히 걸어가셨습니다. 저는 이 설교를 기도로 준비하면서 문득 가슴을 치는 깊은 묵상을 하게 되었습니다. 골치 아픈 신학적인 교리들은 잠시 접어두고, 주님은 대체 왜 보잘것없는 나를 위해 물과 피를 쏟으시며 십자가를 지셔야만 했을까.
아, 그것은 바로 주님의 눈에, 우리가 그분의 거룩한 '노다지'였기 때문이 아니었을까요.
주님의 눈에는, 먼지처럼 하루를 살다 사라질 우리가 너무나도 소중한 꽃봉오리로 보였던 것입니다. 비록 세상은 우리를 쓸모없다고 쉽게 낙인찍고, 세상이 정한 성과와 스펙대로 거칠게 재단하며, 허울 좋은 조건들로만 우리를 평가할지라도, 우리 주님의 눈에는 비록 아직 피지 못해 쪼그라들어 있을지라도, 비록 아직은 가시가 가득하고 연약하여 날마다 쓰러질지라도, 마침내 주 안에서 찬란하게 피어날 우리 영혼의 진짜 가치와 영광이 보였던 것입니다.
이 위대한 사랑의 진실을 가슴에 품을 때마다 제 가슴은 말할 수 없는 설렘으로 요동칩니다. 주님이 나를 그토록 가치 있게 여겨 주셨기에, 저 역시 내가 가진 모든 삶의 조건으로, 내게 허락하신 은혜의 시간들로, 할 수만 있다면 사랑의 지경을 더 넓히고 싶습니다. 그리하여 만나는 수많은 영혼들의 마음속에, 주님이 내게 주신 사랑이라는 최고의 보물을 조심스럽게 숨겨두고 싶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런 거룩한 열정으로 가슴 찬 심령 속에 타인을 향한 '시기'가 어떻게 감히 틈을 탈 수 있겠습니까? 세상을 향한 '나태'와 영적인 게으름이 어떻게 우리 마음에 자리 잡을 수 있겠습니까?
'사람'을 나의 영광스러운 '면류관'으로 바라보는 이 복음적인 시선을 세상 속에서 결코 빼앗기지 않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우리가 세상 문 밖을 나서는 순간, 마귀의 수많은 소음들이 오늘 우리가 가슴에 새긴 이 생명의 말씀을 훔쳐 가려고 떼 지어 달려들 것입니다. 그러나 이 생명의 말씀을 영혼의 시계처럼 손목에 단단히 차고 다니십시오. 그리하여 가정에서든, 일터에서든 '사람'을 대할 때마다, 그 '사람' 때문에 억울하고 분노가 치밀어 올라 속이 뒤집어질 때마다, 조용히 속으로 외치십시오. 아니다, 이 '사람'이 바로 장차 내가 쓸 영광스러운 '면류관'이다!
그리고 묵묵히 주님의 사랑으로 그 깨어진 면류관을 소중히 닦아 주는 것,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바로 그것이 세상이 감당하지 못할 진짜 '믿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