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나는 내 마음에 이르기를 자, 내가 시험삼아 너를 즐겁게 하리니 너는 낙을 누리라 하였으나 보라 이것도 헛되도다
전도서 2장에서 가장 많이 나오는 단어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바로 '내가'입니다. 하도 많이 나오길래 한번 세어 보았더니, 이 한 장에 '내가'라는 말이 스물세 번이나 나옵니다.
솔로몬은 왜 '내가'를 이토록 반복했을까요? '내가'라는 1인칭 서술에는 어떤 경험의 집적이 담겨 있습니다. 이것은 내가 직접 겪은 것이다. 지금 하는 이 말은 어떤 책을 참고했거나 누구에게 주워들은 개똥철학이 아니라, 내가 삶으로 직접 경험해 낸 것이다. 그것을 강조하기 위해 솔로몬은 '내가, 내가'를 거듭 못 박은 것입니다.
2장 1절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전도서 2:11나는 내 마음에 이르기를 자, 내가 시험삼아 너를 즐겁게 하리니 너는 낙을 누리라 하였으나 보라 이것도 헛되도다
이 말은 전도자가 자기 자신의 인생을, 그 실험대 위에 한번 올려놓고 실험해 보았다는 뜻입니다.
저는 전도서 2장을 읽다가 약 삼십 년 전 읽었던 소설 한 편이 떠올랐습니다. 이은성 작가의 『동의보감』입니다. 명의가 되고 싶었던 허준이 스승 유의태를 찾아가고, 두 사람 사이에 오가는 이야기가 상·중·하로 엮인 소설입니다. 삼십 년 전 읽은 내용이 다 기억나지는 않지만, 결코 잊히지 않는 한 장면이 있습니다.
유의태가 어느 날 암에 걸립니다. 손도 쓸 수 없는 말기 암이었습니다. 자기 몸속에 손쓸 수 없는 병이 들어온 것을 깨달은 유의태는 깊은 고민 끝에 제자 허준을 부릅니다. 그러고는 이렇게 말합니다. 의술은 글로만 알 수 없고, 사람의 몸을 직접 보지 않으면 결코 사람을 살릴 수 없다. 그러니 내 배를 갈라 해부하라. 허준이 기절초풍할 말이었습니다. 그렇게 유의태는 자기 몸을 해부학 교과서로 제자에게 내어 줍니다. 후대에 자기와 같은 병으로 고생하는 사람들이 나음을 얻게 하려고, 죽어 가면서 할 수 있는 마지막 일로 자기 몸을 내어 준 것입니다.
유의태가 자기 몸 하나를 내어주며 의술의 발전에 이바지했다면, 솔로몬은 자기 인생 전부를 실험대에 올려놓습니다. 올려놓고 말합니다. 내가 내 인생을, 사람들이 모두 원하는 그것들을 한번 실험해 보았다.
전도서 2:1010무엇이든지 내 눈이 원하는 것을 내가 금하지 아니하며 무엇이든지 내 마음이 즐거워하는 것을 내가 막지 아니하였으니 (…)

어떻게 보면 수치스러운 일입니다. 자기 내면을 온통 벗어 다 드러내는 일이니까요. 그럼에도 솔로몬이 자기 삶을 인생 실험대에 올린 이유가 무엇일까요? 후대에 사는 사람들, 저와 여러분이 포함되겠지요. 이 사람들이 솔로몬 자신이 겪었던 그 불행, 붙잡을 수 없는 것을 붙잡으려다 불행해지는 병에서 벗어나기를 바라는 간절한 마음이 담겨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이미 보았습니다. 붙잡을 수 없는 것을 붙들려고 쫓아가다, 비눗방울처럼 잡는 순간 터지는 것이 인생이라는 사실을 말입니다.
유의태가 자기 몸을 내어주며 의술을 남겼다면, 솔로몬은 자기 인생을 실험대에 내어주며 후대에 지혜의 유산을 남깁니다. 이제 그가 자기 인생으로 시도했던 실험들 속으로 들어가 봅시다.
솔로몬의 실험은 크게 세 가지였는데, 첫 번째는 기분이었습니다. 사람이 기분을 좋게 만드는 것, 거기에 행복이 있지 않을까 하고 그는 기분을 좋아지게 하는 온갖 실험을 해 봅니다.
2절에서 그는 내가 웃음에 관하여 말하여 이르기를 하고 시작합니다. 자신을 기분 좋게 만드는 것이라면 그게 무엇이든 다 해 보았다는 뜻입니다.
지난 주일 저녁, 제 뒤에 앉아 있는 손자 민하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 내일 유치원 갈 생각을 하니 기분이 별로 안 좋아. 그래서 제가 물었습니다. 어떻게 하면 기분이 풀리겠니? 아이가 나름의 해결책을 내놓았습니다. 할아버지랑 목욕탕에 가면 기분이 좋아질 것 같아요.
보십시오. 유치원생도 월요일이 싫습니다. 기분 전환이 필요하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압니다. 저는 그 어린아이를 보며 생각했습니다. 아, 이건 나이의 문제가 아니라 인간의 문제구나. 기분이 오르내리는 것을 어떻게든 다루고 싶어 하는 마음은 아이에게만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 모두에게 있는 것이 틀림없습니다.
솔로몬은 마음에 들어오는 이 기분을 좋게 만들려고 온갖 오락을 다 해 보았다고 말합니다. 술로 풀어도 보고, 노래하는 사람들을 불러 흥을 돋우어도 보고, 자기를 기쁘게 하는 것이 무엇인지 남김없이 실험했습니다. 요즘 식으로 말하면, 젊은이들이 좋아하는 치맥을 마시며 영화를 보기도 하고, 맛집만 찾아다니기도 하고, 여행을 다니고, 주말마다 골프를 치고, 예쁜 카페에서 친한 사람들과 차를 마시며 담소를 나누는 것과 같습니다. 이 모두가 무엇입니까? 전부 자기 기분을 좋게 하려는 것입니다.
물론 이런 것들이 우리 마음을 잠시 이완시켜 주기도 합니다. 나쁜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솔로몬은 그 모든 것을 다 해 본 다음에 이렇게 말합니다.
이것도 헛되도다.
오락이 쓸모없다는 말이 아닙니다. 취미가 무의미하다는 말도 아닙니다. 이렇게 설명해 보겠습니다. 제가 그날 저녁 민하를 데리고 목욕탕에 갔습니다. 아이는 물놀이도 하고 목욕도 하고, 나와서는 바나나 우유까지 사 마시며 기분이 한껏 좋아졌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한다고 월요일이 사라졌습니까? 유치원을 안 가도 되게 되었습니까? 월요일도 그대로, 유치원도 그대로입니다.

기분을 좋게 하는 일들은 잠시 이완을 줄 뿐, 연기처럼 사라져 또 해야 하고 또 해야 합니다. 비눗방울처럼 아무리 잡아도 끝이 없습니다. 궁극적으로 내가 싫어하고 고통스러워하는 것들은 사라지지 않습니다. 그런 의미의 헛됨입니다. 기분을 통해 행복을 붙잡아 보려 했는데, 아침 안개처럼 잠시 있다가 또 사라지더라는 것입니다.
솔로몬은 곧이어 두 번째, 세 번째 실험을 이어 갑니다. 이번에는 성취와 업적을 통해, 그리고 더 나아가 이성을 통해 누리는 기쁨을 통해 행복을 찾아보려 합니다. 마음의 느낌보다는 눈에 보이는 실제적인 것, 손에 잡히는 결과를 만들어 내면 정말 행복이 거기 있지 않을까 여긴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어마어마한 사업을 벌입니다. 2장 4절 이하를 보면 포도원을 일구고, 여러 동산과 과원을 만들고, 각종 나무를 심고, 그 나무에 물을 대려고 못을 팠다고 합니다. 여기서 '과원'으로 번역된 히브리어가 파르데스인데, 여기서 파생된 단어가 바로 우리가 아는 파라다이스입니다.
짚어 둘 한 가지'과원'의 히브리어 파르데스(פרדס)는 '담으로 두른 정원'을 뜻합니다. 영어 파라다이스(paradise)도 같은 뿌리에서 나온 말이지요. 솔로몬이 세운 것은 한낱 정원이 아니라, 사람이라면 누구나 동경하는 '낙원' 그 자체였던 셈입니다.
그러니까 솔로몬은 단순히 좋은 집 하나 지어 놓고 정원에 물 흐르면 행복하겠지, 그런 수준이 아니었습니다. 자신이 가진 모든 지식, 곧 건축학과 수리 공학, 문화와 예술, 학문과 지혜를 총동원해서, 모든 사람이 보고 동경할 만한 파라다이스 같은 도시를 건설한 것입니다. 현대식으로 말하면 랜드마크급 빌딩을 세우고, 나무를 심어 물이 흐르고 숲이 우거진 친환경 신도시를 통째로 만들어 버린 것입니다. 모두가 그 업적을 칭송하지 않을 수 없는 어마어마한 사업이었습니다.

8절을 보면 그뿐 아니라 처첩을 많이 두었다고 합니다.
전도서 2:88은 금과 왕들이 소유한 보배와 여러 지방의 보배를 나를 위하여 쌓고 또 노래하는 남녀들과 인생들이 기뻐하는 처첩들을 많이 두었노라
열왕기상 11장을 보면 솔로몬은 정실 부인이 칠백 명, 첩이 삼백 명, 곧 천 명의 여자를 두었습니다.
열왕기상 11:33왕은 후궁이 칠백 명이요 첩이 삼백 명이라 (…)
넘치는 부에, 솟아오르는 지혜에, 파라다이스 같은 도시에, 예쁜 여자 천 명을 골라 놓고, 이렇게 살면 행복하겠지, 하고 실험해 본 것입니다.
이런 완벽한 환경에서 인간이 본능대로 원하는 모든 것을 다 해 보면, 틀림없이 거기 행복이 있을 거라고 솔로몬은 여겼습니다. 이런 파라다이스에서 예쁜 여자 천 명과 함께 살면서, 솔로몬은 행복했을까요? 이러고도 행복하지 않다면 그게 사람입니까?
그런데 저는 솔로몬의 이 실험을 가만히 들여다보다가 마음이 좀 불편해졌습니다. 왜 불편해졌을까요? 이 세 가지는 누구나 추구하는 것들이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지금 이것이 잘못됐다고 말하는 것 같은데, 내가 추구하는 것들이 바로 다 이런 것들이란 말입니다. 우리는 다 이런 것들을 추구하며 살아왔고, 지금도 마음속에 품고 있습니다.
솔직히 말해 봅시다. 이 솔로몬처럼 한번 살아 볼 기회를 하나님이 주신다면, 여러분은 거절하겠습니까? 우리는 우리 자식들을 바로 그런 삶을 살게 하려고 지금 공부시키는 것 아닙니까? 남자분들에게 천 명의 아내를 준다면, 쓰고 싶은 돈 마음껏 있고 하고 싶은 것 다 할 수 있는 파라다이스에서 살라고 한다면, 여기서 거절할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저는 천 명은 몰라도 한 백 명 정도는 살아 볼 수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지금 웃으셨지요. 그런데 방금 제 이야기를 두고 우리 목사님 농담도 잘하시네 생각하고 있다면, 여러분은 아직 인간이 어떤 존재인지 모르는 것입니다. 자기 자신이 어떤 존재인지, 인간이 얼마나 욕망 덩어리인지를 알지 못하기 때문에 이 이야기가 농담처럼 들리는 것입니다.
제가 개척한 지 이십 년, 목회한 지는 이십몇 년이 되었는데, 안수받던 날부터 선배 목사님들께 늘 들었던 두 가지가 있습니다. 돈 조심, 여자 조심. 한 분은 이렇게도 덧붙이셨습니다. 강 목사는 외모가 좀 걱정이 됩니다.
그런데 저는 이십몇 년 목회하면서 여자 문제로 불거진 적도, 시험 든 적도 한 번 없었습니다. 그것이 제 영성이 깊어서일까요? 아닙니다. 기회가 없었던 것입니다. 바람피울 기회가 없었습니다.
제 아내가 늘 붙어 다니고, 요양병원에서 일하다 보니 제가 만나는 여성분들은 평균 연세가 여든에서 아흔입니다. 그래서 한번 이런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만약 하나님이 제 삼십 대 후반, 사십 대 초반 저를 서울의 연예인 교회로 보내셔서, 예쁜 연예인들만 매일 만나고 그들이 저를 하나님 따르듯 따르며 마음속 이야기를 다 털어놓는 상황이었다면…… 나는 괜찮았을까?
저는 자신이 없습니다. 만약 그런 교회에서 목회했다면, 어쩌면 지금의 아내와 함께 살고 있지 못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제 영성이 어디서 나오는지를 보니, 나는 할 수 있어, 나는 다른 목사와 달라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바로 그 나약함에서 제 영성이 나오는 것 같습니다. 그것이 심령이 가난한 자라고 저는 봅니다. 우리는 절대로 세지 않습니다. 자신이 세지 않다는 것을 아는 사람이 그나마 덜 위험합니다. 가장 위험한 사람은 나는 할 수 있어 하는 사람입니다.
제게 친한 후배 목사님이 한 분 있는데, 교세가 약해 평일 닷새를 밖에서 강의하며 여러 일로 바쁘게 삽니다. 저번 주에 인사를 왔길래 대화 중에 물었습니다. 그렇게 바쁘게 살면서 설교 준비는 언제 해요? 그랬더니 웃으며 이러는 겁니다. 아이고 목사님, 틈날 때마다 하고요, 사실 목사님 설교 엄청 도용하고 있습니다.
저는 그 말에 빵 터졌습니다. 그런데 속으로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야, 이 친구가 나보다 훨씬 세구나. 참 꾸밈이 없구나. 저라면 같은 목사에게 자존심상 그런 말은 못 할 것 같은데, 그는 목사님 설교 도용합니다라는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하더군요.
전도서를 보면 솔로몬에게서도 이런 모습이 참 많이 나타납니다. 모든 것을 가진 지혜의 왕, 모든 사람이 부러워하는 이 사람이 자기의 못나고 나약한 모습을 조금도 숨기지 않고 드러냅니다. 심지어 속 좁은 모습까지 그대로 이야기합니다.
솔로몬은 도시를 만들고 인프라를 놓고, 자연이 어우러진 완벽한 파라다이스를 건설했습니다. 모두가 동경하는 업적과 성취를 이루고, 그 안에서 하고 싶은 모든 것을 다 하며 살았습니다. 그런데 18절에서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해 아래에서 수고한 모든 수고를 어떻게 한다고요? 미워한다고 합니다.
전도서 2:1818내가 해 아래에서 내가 한 모든 수고를 미워하였노니 이는 내 뒤를 이을 이에게 남겨 주게 됨이라
모든 사람이 박수를 보내는 그 일들을 다 이루어 놓고, 왜 자기가 이룬 모든 업적을 미워한다고 말한 것일까요? 얼핏 들으면 속 좁은 말처럼 들립니다. 자기가 이룬 걸 미워한다니, 참 속 좁다. 그러나 그 속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이 말은 정말 치열하게 살아 낸 사람만이 할 수 있는 말입니다.
아무나 할 수 있는 말이 아닙니다. 인생을 대충 살아온 사람은 죽었다 깨어나도 이 말을 못 합니다. 아니, 이해조차 못 할 것입니다.
제가 참 좋아하는 집사님들 중에 이런 말을 한 분들이 있습니다. 목사님, 우리 남편이 정말 미워요. 용서가 안 돼요. 목사님, 우리 시어머니가 정말 이해가 안 돼요. 용납이 안 됩니다. 저는 이런 분들에게 주님이 원수도 사랑하라 하셨는데, 예수 믿는 사람이 그러면 안 됩니다라고 말한 적이 한 번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분들이 그 사람을 미워하지 않으려고 얼마나 애쓰고 몸부림쳤는지를 제가 알기 때문입니다.
미워하지 않으려고 몸부림치고 또 몸부림친 사람만이, 정말 밉고 용서가 안 돼요라는 말을 하게 됩니다. 대충 산 사람은 에이, 그렇게 살면 안 되지 하고 쉽게 말하지만, 진짜 몸부림친 사람은 밉다고, 용서가 안 된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저는 그런 분들에게 바로 사세요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얼마나 이를 악물고 견뎌 왔는지를 알기에, 그저 고개를 끄덕여 드립니다. 마음대로 미워해도 된다고 면죄부를 주는 것이 아니라, 그런 말을 할 수밖에 없는 그 마음을 이해한다는 뜻입니다.
솔로몬이 내가 이룬 업적을 미워한다고 말한 것이 합당하다는 뜻이 아닙니다. 그가 그렇게 말할 수밖에 없었던 그 마음을 이해한다는 것입니다.
사실 솔로몬이 이룬 업적에 비하면 저는 비교 대상조차 못 됩니다. 그래도 굳이 말하자면, 제가 몸담은 병원 계통에서는 꽤 성공한 축에 듭니다. 목회도 세상적 관점으로 보면 보잘것없어 보이지만, 재산도 없고 성도 수도 많지 않지만, 제 목회 방식을 부러워하는 후배 목사님들이 적지 않습니다. 저도 목사님처럼 목회 한번 해 볼 수 있다면. 그런 말을 들으면 제 목회가 아주 실패한 것 같지는 않다는 생각도 듭니다.
그런데 이 모든 것을 이루는 동안 제가 겪은 일들은 다른 사람이 알지 못합니다. 병원을 일구는 동안 원형 탈모가 십 년이 지나도록 사라지지 않을 만큼 어마어마한 스트레스를 받았습니다. 목사가 되고 목회하면서 체중이 십 킬로그램 넘게 빠졌고, 몇 번이나 쓰러졌습니다. 우리 교회를 지키려고 일주일에 수십 시간을 설교 준비에 쏟습니다. 이 설교는 눈을 뜬다고 그냥 서지는 것이 아니라, 일주일 내내 제 영혼과 삶을 갈아 넣어야 나오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육 개월에 한 번 돌아오는 대표 기도 삼 분짜리를 앞두고도 일주일 내내 밥맛이 없다고들 하시지요. 그런데 저는 그 설교를 일주일에 세 번, 외부 일이 많으면 더 해야 합니다. 게다가 저는 상담을 유난히 많이 하는 목사입니다. 상담이 무엇입니까? 다른 사람의 심리적인 짐, 그 냄새나는 것을 받아 주는 요강 노릇 아닙니까? 상담하러 오는 분이 향기를 채워 주러 오지는 않습니다. 늘 누군가의 속엣것을 받아 내야 하는 일이라 에너지 소모가 큽니다. 게다가 부탁하는 분도 어찌나 많은지, 제가 제일 힘들어하는 것이 거절인데 거절해야 할 일이 끝없이 생깁니다.
우리는 흔히 겉으로 성공해 보이는 사람을 부러워하며 말합니다. 저 사람은 재능이 있으니까, 능력이 있으니까, 부모를 잘 만났으니까. 다 틀린 말은 아닙니다.
그러나 성공이란 재능보다는 시간의 집적물입니다.
성공한 사람들의 삶을 들여다보면 이런 공통점이 있습니다. 남이 쉴 때 일하고, 남이 포기할 때 버티고, 남은 모를 일들을 수없이 겪고, 남이 알지 못하는 실패로 눈물 흘리고, 보이지 않는 자리에서 땀을 뚝뚝 흘린 시간, 그것이 언제나 그 안에 쌓여 있습니다.
우리는 솔로몬의 영광을 말할 때 그 지혜의 화려함과 성공만 봅니다. 그러나 조금만 들여다보면, 그는 국가를 운영해야 하는 무게에 늘 짓눌려 살았고, 수많은 사람의 책임을 가슴에 안고 살았습니다. 실패하면 나라가 흔들린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았기에, 그는 애타는 결단을 반복했을 것입니다. 그가 이룬 모든 성취 뒤에는 남모를 피땀이 있었고, 몸서리치는 두려움 속에서도 내려야 하는 선택이 있었고, 홀로 지새운 수많은 밤의 외로움과 고통이 있었을 것입니다. 저는 그 성공의 뒷문을 열고 들어가 솔로몬의 속을 한번 들여다보았습니다. 얼마나 외로웠으면 이런 실험까지 했을까.

그런 솔로몬이 어느 날 문득 깨닫습니다. 내가 이룬 이 모든 것을, 나는 하나도 가져갈 수 없구나. 더 충격적인 것은, 자신이 목숨 바쳐 이룬 이 업적을 뒷사람이, 자기 자식이 가져가는데, 그 자식이 형편없는 사람일 수도 있다는 사실이었습니다.
실제로 솔로몬의 영광은 그 아들 르호보암이 물려받습니다. 그런데 성경을 읽어 보면, 르호보암은 그 영광을 지키지 못하고 여로보암에게 대부분을 빼앗깁니다. 여로보암이 누구입니까? 솔로몬의 대적입니다. 자기 자식에게 모든 것을 물려주었는데, 결국 그것을 자기 원수에게 빼앗기고 마는 것입니다.
그래서 솔로몬은 이 모든 것을 바라본 뒤에 이렇게 말합니다. 이것도 다 헛되며, 내가 쌓은 이 모든 업적을 나는 미워한다.

이 모든 실험이 끝나고 솔로몬이 내린 인생의 결론이 오늘 본문, 2장 24절입니다.
전도서 2:2424사람이 먹고 마시며 수고하는 것보다 그의 마음을 더 기쁘게 하는 것은 없나니 내가 이것도 본즉 하나님의 손에서 나오는 것이로다
이 말씀을 흔히 이렇게 해석합니다. 욕심부리지 말고 소소하게 살아라. 소확행이 행복이다. 그러나 그런 뜻이 아닙니다. 이 말씀은 욕망을 포기하라는 말이 아닙니다. 욕망을 끝까지 밀어붙여 본 사람의 입에서 나온 말입니다.
욕망대로 다 살아 본 사람이 하는 말이지, 그 욕망 버려라, 작게 살아라 하는 말이 아닙니다. 다 가져 본 사람의 말이고, 다 누려 본 사람의 말이고, 다 해 본 사람의 말입니다. 하다가 실패해서 그냥 이게 맞아 하는 것이 아니라, 다 성공하고 다 누려 보고 다 경험해 보고, 모든 것을 다 보고 다 아는 사람이 한 말입니다.
솔로몬은 이렇게 결론을 맺습니다. 내가 다 실험해 보고, 다 해 보니, 내가 찾던 행복이 멀리 있는 게 아니라 오늘 먹고 마시는 일상에 있더라. 멀리 미래에 있는 줄 알고 모든 것을 목적 삼아 찾아다녔는데 다 헛것이었고, 다 이룬 줄 알았더니 엉뚱한 사람이 가져가더라. 나는 행복을 엉뚱한 데서 찾았다.
오늘 먹고 마시는 이 일상, 오늘 일터에서 일하는 이 일상, 몸이 건강해 설거지할 수 있는 이 일상, 누군가를 만날 수 있는 이 일상, 오늘이라는 이 포장지, 이 보자기에 담겨 보내진 하루가 다 하나님의 손에서 나온 것임을 내가 알았다. 거기에 행복이 있더라.
이것은 우리가 1주차에 이미 내렸던 결론입니다. 앞으로 12장까지 계속 이 결론이 반복됩니다. 지난주 1장 설교를 제대로 듣고 소화했다면, 여러분은 이미 전도서에 대해 모르는 것이 없는 사람들입니다. 나머지는 이것을 거듭 되새기는 것에 불과합니다.
설교를 마무리하며 한 가지 표현을 나누고 싶습니다. 우리는 가끔 개만도 못하다는 말을 듣습니다. 이 말을 들으면 기분이 상하고 자존심이 상하십니까?
저는 예전에는 이 말이 몹시 모욕적으로 들렸습니다. 그런데 요즘은 이런 생각이 듭니다. 사람이 개만도 못하다는 이 말은, 사람을 모욕하려는 말이라기보다 사람이 기쁨과 감사에 얼마나 둔감한지를 보여 주려는 말이 아닐까. 우리가 너무 기쁨과 감사를 잃고 사니까 나온 표현이 아닐까 하고 말입니다.
개가 밥 먹는 모습을 보신 적 있습니까? 개에게 밥을 주면 어떻게 먹습니까? 그냥 맛있게 먹는 정도가 아니라, 사흘을 굶었던 것처럼 어쩔 줄 몰라 하며 기뻐하면서 먹습니다. 밥이 얼마나 감사하고 소중한지, 그 모습을 보면 개는 밥그릇 앞에서 마치 경배를 하는 것 같습니다.
지난주에 만시 스님 이야기를 했지요. 개는 밥상 앞에서 경배를 합니다. 기뻐하라,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 우리의 제사가 기쁨의 제사, 감사의 제사가 되어야 한다는데, 개는 주인이 준 밥그릇 앞에서 그 음식을 경배하듯 너무도 기쁘고 감사하게 먹습니다. 그런데 사람은 밥상 앞에서 무엇을 합니까? 경배가 아니라 평가를 합니다.
임금님 밥상보다 잘 차려 먹으면서도, 우리는 밥을 앞에 두고 밥맛 없다 하며 인상을 씁니다. 우리 중에 세종대왕보다 못 먹는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원하는 것 다 먹지 않습니까? 기쁨과 감사가 눈곱만큼도 없습니다. 밥상이 경배의 자리, 예배의 자리가 아니라 평가의 자리가 되는 것입니다. 오늘 뭐 먹지? 먹을 것 없네.
옛날 청교도들은 딱딱한 빵 한 조각을 놓고도 기도했다고 합니다. 하나님, 모든 것을 주신 것만으로도 감사한데 이런 빵 조각까지 주시다니요. 그런데 산해진미를 먹고 싶은 대로 골라 먹으면서도, 우리는 밥상 앞에서 경배자가 아니라 평가자로 앉습니다. 그러니 개만도 못하다는 말이 나옵니다.
나는 밥상 앞에서 경배자입니까, 아니면 평가자입니까?
불교에서는 이런 말을 합니다.
쌀 한 톨 안에도 우주가 담겨 있다.
불교
쌀 한 톨 안에 어떻게 우주가 담겨 있을까요? 그 안에는 하나님이 보내신 햇살이 담겨 있고, 하나님이 보내신 바람이 담겨 있고, 하나님이 보내신 비가 담겨 있습니다. 자기를 내어준 흙의 섬김이 담겨 있고, 허리 굽힌 농부의 땀과 헌신이 담겨 있습니다. 봄·여름·가을·겨울, 각 계절이 제자리를 묵묵히 지켜 준 그 은혜가 이 작은 쌀 한 톨 안에 다 담겨 있습니다.

이것을 알고 먹으면, 밥상이 어찌 기쁨의 자리가 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내가 번 돈으로, 내가 사서, 내가 먹는다 생각하는 순간 그 안에서 하나님이 다 빠져나가 버립니다. 은혜가 담겨 있다는 것을 잊고 먹으니, 내 월급으로 샀는데 반찬이 이것밖에 안 돼 하는 불평만 남습니다. 감사는 사라지고, 예배는 사라지고, 입 속으로 밀어 넣는 노동만 남습니다.
개는 주인이 아침에 나갔다 저녁에 돌아와도, 죽은 사람이 살아 돌아온 것처럼 뛰고 꼬리를 흔들며 온몸으로 반깁니다. 우리는 누군가를 그렇게 온몸으로 사랑하고 반겨 본 적이 있습니까? 여러분의 가족을 말입니다. 그것이 바로 예배입니다. 그 사람이, 그 상황이 하나님의 손에서 나온 선물임을 알고 받는 것, 그것이 예배입니다.
오늘 코헬렛이, 이 전도자가 행복의 해답으로 우리에게 내놓은 본문 말씀은 지난주와 같습니다. 오늘을 누려라. 이것은 선물이니 오늘을 누리라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욕망을 접으라는 말씀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주신 오늘이라는 선물, 그 포장지를 뜯어 정말 기쁘고 감사하게 누리는 것, 바로 거기에 행복의 해답이 있다는 것입니다. 보기 싫은 남편도, 아내도 선물입니다. 오늘 먹는 밥도, 오늘 일하는 일터도, 내 수고도, 오늘 만나는 사람도 다 하나님이 주신 선물입니다. 이것을 알고 하루를 살아 내는 것, 거기에 행복의 해답이 있습니다.
저는 오늘 새벽 네 시에 눈을 떠 커튼부터 걷었습니다. 어제 눈이 온다는 예보를 보았기에 정말 왔는지 궁금했던 것입니다. 열어 보니 온 세상이 하얗게 변해 있었습니다. 저는 눈을 좋아하지만 주일에 오는 눈은 그리 반갑지 않습니다. 성도들이 먼 길 오시는데 괜찮을까 걱정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오늘 새벽만큼은, 커튼을 열고 눈을 바라보며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이 하얀 눈을 내가 앞으로 몇 번이나 더 볼 수 있을까.
몇 번이나 더 볼 기회가 남았을까. 오늘 이 아름다운 눈을 볼 수 있는 기회가 지금 지나가고 있구나. 눈을 유한한 것으로, 내가 죽는 날까지 그리 많이는 볼 수 없는 것으로 여기니, 그 눈이 그렇게 예쁘게 보였습니다. 그래서 눈길이 미끄러울까 걱정하는 대신, 오는 길에 아내에게 말했습니다. 저 산에 덮인 하얀 색깔 좀 봐, 저 논밭 좀 봐. 그렇게 눈꽃에 찬사를 보내며 왔습니다.

똑같은 눈을 보는데도 걱정하는 사람이 있고 감탄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주신 것이구나 생각하니 너무 귀하게 느껴지고, 그저 내 상황 속 불편으로만 여기면 보기 싫어집니다. 오늘이라는 선물 속에 하나님이 무엇을 담아 보내셨는지를 생각하며 바라보면, 모든 것이 아름답게 보입니다.
솔로몬은 오늘, 거기에 행복의 해답이 있다고, 그것이 하나님의 손에서 왔다는 것을 잊지 말라고 말합니다. 답은 하나님의 손입니다. 오늘이 하나님의 손에서 보내졌다는 것을 알고, 그 포장지를 열어 하나님을 함께 읽어 내기 시작할 때, 우리는 행복의 진짜 답을 찾을 수 있습니다.
이 해답을 아는 것으로 끝나지 않고, 누릴 줄 아는 데까지 나아가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