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다윗의 아들 예루살렘 왕 전도자의 말씀이라
2전도자가 이르되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
3해 아래에서 수고하는 모든 수고가 사람에게 무엇이 유익한가
오늘부터 우리는 열네 주에 걸쳐 전도서의 세계로 들어갑니다. 제가 약 사십 년 전 처음 성경을 읽으며 전도서를 만났을 때, 저는 제목만 보고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아, 이 책은 전도에 관한 책이구나. 아마 저처럼 생각한 분도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막상 읽어 보니 전도서는 전도 방법을 일러 주는 책이 아니었습니다. 훨씬 더 깊고 깊은, 삶에 관한 책이었습니다.
돌아보면 제가 신약에서 가장 많이 읽은 책이 로마서라면, 구약에서 가장 많이 읽은 책은 전도서였습니다. 그만큼 전도서는 저와 성향이 잘 맞았고, 제게는 참 매력적인 책이었습니다.
전도서는 이렇게 시작합니다.
다윗의 아들 예루살렘 왕 전도자의 말씀이라.
여기서 '전도자'라는 말은 히브리어로 코헬렛입니다. 우리말로 옮기면 '지혜를 전하는 자'라는 뜻이고, 조금 더 토속적으로 표현하면 '도(道)를 전하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성경은 이 전도자를 '다윗의 아들 예루살렘 왕'이라고 소개합니다. 이 표현을 들으면 자연스럽게 한 사람이 떠오릅니다. 바로 솔로몬입니다.
그런데 흥미로운 점이 있습니다. 전도서에는 '솔로몬'이라는 이름이 단 한 번도 나오지 않습니다. 그래서 많은 성경 학자들은 전도서가 솔로몬의 책이 아니라고 주장해 왔습니다. 잠언과 아가서에는 솔로몬의 이름이 분명히 나오기 때문입니다. 잠언은 다윗의 아들 이스라엘 왕 솔로몬의 잠언이라로 시작하고, 아가서도 솔로몬의 아가라로 시작합니다. 그런데 전도서에는 그 이름이 없으니, 솔로몬의 책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잠언 1장 1절1다윗의 아들 이스라엘 왕 솔로몬의 잠언이라
아가 1장 1절1솔로몬의 아가라
하지만 저는 이 부분을 조금 다르게 읽습니다. 전도서는 자신을 '다윗의 아들 이스라엘 왕'이라 말하고, 뒤로 가면 나만큼 지혜가 많은 사람이 없다고 말하며, 누구보다 많은 소유를 가졌고 수많은 아내와 첩을 두었다고 말합니다. 이런 내용을 보면, 이름이 나오지 않는다는 이유만으로 솔로몬이 아니라고 단정하는 것이 오히려 어색하게 느껴집니다.
그렇다면 질문은 이것입니다.
솔로몬은 왜 자기 이름을 전도서에 쓰지 않았을까.
저는 이것이 상당히 의도적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잠언과 아가서는 비교적 젊은 시절의 솔로몬을 보여 줍니다. 그러나 전도서는 죽음을 앞둔 인생 말년에, 솔로몬이 자기 삶 전체를 돌아보며 쓴 글에 가깝습니다.
솔로몬은 통치 전반기에 하나님이 주신 지혜로 나라를 잘 다스려, 선군 중의 선군으로 칭송받던 사람입니다. 그러나 나라가 태평성대에 이르자 그는 변질되기 시작했습니다. 이방 여인들과 결혼했고, 그 여인들이 가지고 온 우상을 일부 허용했으며, 끝내 백성들의 우상 숭배까지 허락하는, 해서는 안 될 죄를 저질렀습니다.
인생의 끝자락에서 자기 삶을 돌아볼 때, 솔로몬은 그 과오에 부끄러움을 느꼈을 것입니다. 아, 이런 것들은 정말 너무 한심했다. 내가 너무 부끄럽다. 그런 마음이 들지 않았을까요? 메신저에게 문제가 있으면 메시지도 손상을 입습니다. 자신이 쓰는 이 글이 자기 이름 때문에 오히려 손상될 수 있다고 여겼기에, 솔로몬은 의도적으로 자기 이름을 뺐을지도 모릅니다.
물론 이것은 확정된 사실이 아니라 제 추측입니다. 다만 저는 전도서를 읽으며 그렇게 생각해 보았습니다.
사람의 본성은 자기 이름을 드러내고 싶어 합니다. 제가 국민학교에 다닐 때만 해도 책상마다 아이들이 칼로 자기 이름을 파 놓곤 했습니다. 삐뚤삐뚤한 글씨로, 하나도 빠짐없이. 녹색 페인트로 칠한 그 책상에 전부 자기 이름을 새겨 놓았습니다.

철이 들어서는 관광지 바위에 이름을 쓰고 아이 러브 유 같은 글을 남기기도 합니다. 인간에게는 본능적으로 자기 이름을 남기고 싶어 하는 마음이 있습니다.

얼마 전 이런 사건이 있었습니다. 베스트셀러 작가로도 알려진 한 유명한 의사가, 자신의 책을 쓰는 데 도움을 준 대학원생을 스토커로 고소한 일이었습니다. 내용을 들여다보니 돈 때문만도, 책 내용 때문만도 아니었습니다. 그 책은 사실상 대학원생이 거의 써 주었는데, 이름만 의사의 이름으로 올라간 것입니다. 문제의 핵심은 이름이었습니다. 공저자 이름이 빠졌다는 것, 그것이 뇌관이었습니다. 책은 내가 썼는데 왜 내 이름을 빼느냐. 결국 법정 다툼의 본질은 그 한마디였습니다.
사람은 왜 자기 이름이 거론되지 않으면 고통을 느낄까요? 자기 이름이 빠지는 순간, 자기 존재가 부정당하는 것처럼 느끼기 때문입니다.
회사 생활도 그렇습니다. 내가 쓴 보고서를 상관이 가로채 자기 이름으로 올리면 큰 스트레스를 받습니다. 내가 했는데 왜 상관의 이름이 올라가는가. 하다못해 교회 주보에 자기 이름이 빠져도 섭섭해지는 것이 인간의 본성입니다. 지금도 많은 교회가 주보에 헌금한 사람들의 이름을 기록합니다. 어찌 보면 이름을 남기고 싶어 하는 인간의 본능을 교회가 건드리고 이용하는 것처럼 느껴질 때도 있습니다.
어떤 교회 주보를 보면 후원하는 선교지와 교회 이름이 빽빽하게 적혀 있습니다. 선교지와 한국 교회, 국내 교회를 수십 군데나 적어 둡니다. 그런데 속을 들여다보면 오만 원, 십만 원을 보내는 경우도 많습니다. 한번 반대편 입장에서 생각해 봅시다. 도움을 받는 교회 입장에서 우리 교회 이름이 저기 적혀 있구나 싶으면 자존심이 상하지 않을까요? 받는 교회로 몇 년째 이름이 올라간다면 더욱 그럴 것입니다. 그런데도 굳이 이름을 올립니다. 왜일까요? 우리 교회는 이렇게 도와주는 교회다라는 그 이름을 알리고 싶은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왼손이 하는 일을 오른손이 모르게 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왼손이 하는 일을 왼손도 알게 하고 오른손도 알게 하고, 때로는 SNS에 확성기를 달아서라도 모두에게 알리고 싶어 합니다. 오죽하면 이런 속담이 있겠습니까.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
속담
저는 오랫동안 제가 이름을 알리는 데 소극적인 사람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유명세를 만들고 싶은 욕구 같은 것은 제게 없는 줄 알았습니다. 이름을 알리는 일이 오히려 거북하게 느껴졌습니다. 나는 내 이름을 알리고 싶어 하지 않는 사람이다. 그렇게 생각하며 살아왔습니다.
그런데 제 깊은 속을 들여다보니, 저는 이런 사람이었습니다.
나는 내 이름이 알려지지 않는 것을 알리고 싶어 하는 사람이었습니다.
나는 이름을 알리고 싶어 하는 속물들과는 다르다, 바로 그 사실을 알리고 싶어 하는 마음이 제 안에 있었던 것입니다. 인간에게는 이런 본능이 다 있습니다. 어떻게든 자기 이름을 알리고 싶어 합니다. 수준 높게 알리느냐, 수준 낮게 알리느냐의 차이가 있을 뿐, 우리 모두는 알리고 싶어 합니다.
그런데 한번 물어야 합니다. 그렇게 알려진 이름이 얼마나 오래갈까요?
우리는 고조할아버지와 고조할머니의 이름을 알고 있을까요? 증조할아버지와 증조할머니의 이름은요? 외할아버지와 외할머니의 성함조차 또렷이 기억하기 어려운 경우가 많습니다.

우리가 기억하는 것이라고는 흑백 사진 속 빛바랜 모습 정도입니다. 불과 한두 세대만 지나도 이름은 희미해집니다.
지금 우리는 여기 앉아 예배드리고 있지만, 백 년만 지나도 우리 이름을 기억할 사람은 거의 없을 것입니다. 누가 우리를 알겠습니까. 지금은 천년만년 살 것처럼 자기 이름을 알리려 온갖 방법을 다 쓰지만, 백 년만 지나면 아무도 우리 이름을 모릅니다. 한두 세대만 지나도 잊힐 그 이름을, 자기 이름 세 글자를 남기려고 우리는 그토록 애쓰고 다투고 소모하며 살아갑니다.
그런 인생을 향해 코헬렛은 오늘 이렇게 말합니다.
전도서 1장 2절2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
헛되도다. 이름을 알리려 하는 그 모든 것이 다 헛되도다.

전도서에서 '헛되다'로 번역된 히브리어는 헤벨입니다. 이 단어는 전도서를 이해하는 데 결정적으로 중요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헛되다'는 말을 들으면 곧바로 공허함, 허무함을 떠올립니다. 그래서 전도서를 비관주의나 염세주의의 책처럼 읽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렇게 읽으면 전도서를 깊이 오해하게 됩니다. 헤벨이라는 이 단어를 완전히 붙잡지 못하면, 전도서는 절대로 이해할 수 없습니다.
헤벨은 전도서를 관통하는 주제이자, 전도서를 보는 렌즈입니다. 안경입니다. 이 렌즈 없이는 전도서가 보이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헤벨은 무엇일까요? 헤벨은 단순히 '없다'는 뜻이 아닙니다. 붙잡을 수 없다는 뜻입니다. 이 단어를 그림으로 떠올리면 이런 것들입니다.
입김. 안개. 우리 아이들이 좋아하는 비눗방울.
이것들이 바로 헤벨입니다. 입김은 분명히 보입니다. 안개도 존재합니다. 비눗방울도 눈앞에 떠 있습니다. 그러나 손으로 붙잡으려 하면 사라집니다. 보이지만 잡히지 않는 것, 존재하지만 소유할 수 없는 것, 그것이 헤벨입니다.

그러므로 전도서는 인생은 허무하다, 다 부질없다, 바둥바둥 살아 봐야 의미 없다라고 말하는 책이 아닙니다.

많은 사람들이 헤벨을 '없음'으로 해석합니다. 그러나 헤벨은 '없음'이 아니라 '붙잡을 수 없음', 곧 있는데 붙잡을 수 없음입니다. 아무것도 없다는 절망이 아니라, 분명히 있지만 손에 쥘 수 없다는 깨달음입니다.
우리는 이 '붙잡을 수 없음'을 보지 못하고 자꾸 '없음'만 봅니다. 그래서 전도서를 읽으며 허무주의로 빠집니다. 쇼펜하우어나 소포클레스 같은 이들도 이런 식으로 허무를 읽어 냈습니다.
안개는 있습니다. 입김도 있습니다. 보이지만 손에 쥐려 하면 어떻게 됩니까. 사라집니다. 그것이 헤벨입니다. 있지만 잡으면 사라진다. 그것이 헤벨입니다.
그렇다면 전도서는 왜 그토록 헤벨을, 헛됨을 강조할까요? 거기에는 중요한 이유가 있습니다.
전도서가 헛됨을 말하는 것은 허무를 드러내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그 허무함을 통해 반대편에 무엇이 있는지를 보여 주기 위해서입니다. 허무를 보여 주면서, 그 허무함 반대편에 다른 것이 있다는 사실을 가리키기 위해 허무를 등장시키는 것입니다.
짚어 둘 한 가지예수님께서도 그러셨습니다. 공생애를 시작하시며 천국이 가까이 왔다고 말씀하셨는데, 그 앞에 먼저 하신 말씀이 있습니다. 회개하라. 복음도 처음부터 은혜의 언어로만 오지 않습니다. 복음이 우리에게 가장 먼저 외친 소리는, 우리가 얼마나 죄인이며 얼마나 무력한 존재인지였습니다.
그러나 복음이 우리의 죄성을 드러내는 이유는 우리를 절망에 가두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그 죄를 통해 반대편에 있는 은혜를 보게 하려는 것입니다. 그래서 복음은 먼저 죄를 외쳤습니다.
저는 전도서를 읽으며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전도서는 십자가와 같은 언어를 쓰는구나.
전도서와 십자가는 같은 언어를 씁니다.
십자가는 인간의 선함과 종교적 열심을 전부 무력화시킵니다. 전도서는 인간의 업적과 재능과 이름을 전부 해체시킵니다. 그런 면에서 전도서는 허무의 선언이 아니라 복음의 서문이라 할 수 있는, 상당히 깊은 책입니다.

인간은 정직한 절망 앞에 서 보아야 자기의 진짜 모습을 발견합니다. 행복이 행복으로 느껴지는 이유는 불행이 곁에 서서 기능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불행이 제 역할을 하지 않으면, 우리는 행복이 있어도 그것이 행복인 줄 모릅니다.
사랑도 그렇습니다. 젊은 날 누군가를 뜨겁게 사랑할 때 가슴이 콩닥콩닥 뛰는 이유는, 그 사랑이 빠져나갈 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알기 때문입니다. 그 사랑이 무조건 내 것이 된다면 그렇게 가슴이 뛸 리가 없습니다. 사랑에 가슴이 뛰는 것은, 그 사랑이 이루어지지 않을 가능성이 있기 때문입니다.
건강이 소중하게 느껴지는 것은 질병이 바로 옆에 있기 때문입니다. 자식이 잘되면 눈물 나게 고마운 것은, 그 자식이 잘되지 않을 수도 있다는 사실을 우리가 알기 때문입니다. 내 자식이 기도만 하면 무조건 잘된다면 무엇이 그리 감사하고 가슴이 뛰겠습니까. 우리 삶이 이토록 소중한 것은, 그 곁에 죽음이 도사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전에 김홍신 작가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
겪어 보면 안다굶어 보면 안다, 밥이 하늘인 것을
일이 없어 놀아 보면 안다, 일터가 낙원인 것을
아파 보면 안다, 건강이 얼마나 큰 재산인 것을
— 김홍신
이것이 바로 헤벨입니다. 헤벨은 허무를 이야기하는 것 같지만, 사실은 허무를 통해 무언가를 가리키고 있습니다.
복음도 똑같은 구조로 우리를 부릅니다. 복음은 너 괜찮다, 너 잘하고 있다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이렇게 말합니다.
너는 연약하다. 너는 아무것도 아니다. 낫띵. 너는 죽을 존재다. 갈수록 몸은 쇠약해질 것이고 결국 죽을 수밖에 없다. 그래서 너에게는 은혜가 필요하다.
이것이 복음이 말하는 방식입니다.
우리가 자기 안의 정직한 절망 앞에 서 보지 못하면, 은혜는 감동이 아니라 한낱 정보에 그칩니다. 교회 안에는 은혜를 감동으로 품고 사는 것이 아니라 정보로만 가지고 살아가는 종교인들이 적지 않습니다. 그런 모습을 볼 때마다 정말 저 안에 생명이 있을까 싶어 마음이 아픕니다.
전도서가 헛됨을 끝까지 말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전도서는 우리를 허무주의자나 염세주의자로 만들려는 책이 아닙니다. 오히려 오늘이라는 하루를 너무도 많은 사람이 가치 없이, 의미 없이 흘려보내는 것을 전도자가 견딜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이라는 이 하루가 우리에게 얼마나 소중하고 의미 있고 가치 있는지를 보여 주기 위해, 전도자는 허무를 들이댑니다. 이것을 보지 못하면 전도서의 깊이를 볼 수 없습니다.
전도서의 렌즈는 헤벨이고, 헤벨은 붙잡을 수 없다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붙잡을 수 없는 것을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붙잡지 않아야 합니다.
안개와 입김을 붙잡으려 하면서 안 잡힌다고 화내는 것은 어리석은 일입니다. 붙잡을 수 없는 것은 붙잡지 않아야 합니다. 인생이 왜 고통스럽습니까. 붙잡을 수 없는 것을 붙잡으려 하고, 붙잡을 수 있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허무해지는 것입니다.
비눗방울을 보십시오. 빛을 머금고 그 빛에 굴절되어 반짝이는 모습이 얼마나 예쁩니까. 아이들은 비눗방울을 보면 웃으며 따라갑니다. 그런데 그 비눗방울을 잡으려는 순간 어떻게 됩니까. 퍽 하고 사라집니다.
비눗방울이 왜 터졌을까요? 아이의 손이 거칠어서일까요? 아닙니다. 붙잡을 수 없는 것을 붙잡으려 했기 때문에 터진 것입니다.
젊음도 그렇습니다. 너무 젊어지려고 바락바락 악쓰지 마십시오. 젊음은 붙잡을 수 없습니다. 세월이 가면 우리는 늙어 갑니다. 아무리 건강을 지키려 해도 나이가 들면 아플 확률은 높아집니다. 그것이 인생입니다. 젊음도, 사랑도, 사람들에게 인정받는 것도 붙잡을 수 없습니다. 붙잡으려 하면 터지게 되어 있습니다.
이름도 마찬가지입니다. 내 이름을 꽉 붙들려 하는데 붙들리지 않으니, 그 자리에서 분노가 생깁니다. 자기를 나타내고 싶고 알리고 싶은 마음도 결국 이름의 문제입니다. 자아는 이름 안에 다 들어 있습니다. 그 이름을 붙잡으려 하는데 잡히지 않으니, 우리 안에 분노가 생깁니다.
성과를 붙잡으려 하니 비교가 생깁니다. 성과는 반드시 비교를 데려옵니다. 사랑을 붙잡으려 하니 시기와 질투가 생깁니다. 시간을 붙잡으려 하니 조급함과 후회가 생기고, 돈을 붙잡으려 하니 욕망에 주인 자리를 내어주게 됩니다. 그런데 돈을 정말 붙잡을 수 있습니까. 내 돈이 정말 내 돈입니까.
이런 것들은 하나님이 붙잡으라고 주신 것이 아닙니다. 누리라고 주신 것입니다.

그런데 너무도 많은 사람이 욕망에 빠져, 누려야 할 것을 붙잡으려 합니다. 그러니 속이 터집니다. 입에 속 터진다는 말을 달고 사는 사람이 많습니다. 아, 속 터져. 속 터져. 그러나 누군가 우리를 속 터지게 해서만은 아닙니다. 붙잡을 수 없는 것을 붙들려 하기 때문에 속이 터지는 것입니다.
결혼을 앞둔 사람에게 꼭 이런 훈수를 두는 이들이 있습니다. 초장에 잡아야 돼. 한마디 더 보탭니다. 내가 초장에 못 잡아서 이 고생하잖아. 초장에 잡으라고.
그러면 정말 초장에 잡으면 행복해질까요? 잡은 사람에게 한번 물어보고 싶습니다. 정답부터 말하면, 잡은 사람이든 잡힌 사람이든 둘 다 불행해집니다.
잡혀 사는 사람은 잡고 사는 사람을 보며 생각합니다. 참 속 편하겠다. 저 사람은 잡고 사니까 하고 싶은 대로 다 하니까. 그런데 잡고 사는 사람의 속을 한번 들여다본 적이 있습니까?
겉으로 보면 잡고 사는 사람은 행복해 보입니다. 힘도 있고, 말도 세고, 영향력도 결정권도 있어 보입니다. 그러나 그 속을 들여다보면, 그는 행복하기 위해 잡는 것이 아닙니다. 불안하지 않기 위해 잡고 있습니다.
그는 그것이 안개인 줄을 모릅니다. 잡고 잡히는 그 사람이 사실은 붙잡을 수 없는 존재라는 것을, 안개라는 것을 모르는 것입니다. 그래서 잡는 사람도 잡히는 사람도 다 불행합니다. 왜 그럴까요?
잡는 사람은 사람을 잃고, 잡히는 사람은 자기를 잃습니다.
잡는 사람에게는 존경하는 관계가 하나도 남지 않습니다. 잡히는 사람에게는 자아가 남지 않습니다. 그래서 둘 다 불행해집니다. 그 관계에 남는 것은 한숨과 긴장뿐이고, 때로 그 긴장은 폭발로 바뀝니다. 결국 그들의 입에서는 한숨처럼 이런 말이 새어 나옵니다. 속이 터져 죽을 것 같아. 속 터져. 속이 답답해.
이것이 헤벨을 붙들려 하기 때문에 생기는 현상입니다. 전도서의 언어로 말하면, 이런 부부는 둘 다 헤벨을 붙잡는 삶을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지금 이 시간 자신에게 물어야 합니다.
나는 배우자를, 혹은 누군가를 온갖 방법으로 붙잡아 두려 하며 살아가고 있는가? 아니면 그 존재를 누리며 살아가고 있는가?
붙잡아야 행복할 것 같아서 누군가를 붙잡고, 또 누군가에게 붙잡힌 채 살아가고 있습니까? 아니면 하나님이 오늘 내게 보내신 그 존재를 누리며 살아가고 있습니까? 이 질문 하나만으로도 알 수 있습니다. 우리가 헤벨을 붙잡고 사는 사람인지, 헤벨을 누리고 사는 사람인지.
오래전, 약 백 년 전 일본에 살았던 만시라는 스님의 글을 읽은 적이 있습니다. 저는 청년 시절 이 문장을 만났고, 얼마나 통쾌했던지 오랫동안 제 좌우명처럼 가슴에 담고 살았습니다. 이렇게 살다가 연기처럼 죽자, 깨끗하게 죽자. 청년 때는 이 말씀이 너무도 와닿았습니다. 그런데 훗날 전도서를 만나고 읽고 소화하다 보니, 전도서를 용광로에 넣으면 바로 이 문장이 나오겠다 싶었습니다.
먹을 거 있으면 맛있게 먹고,
입을 거 있으면 고맙게 입고,
먹을 거 입을 거 떨어지면 깨끗하게 죽는다.
만시 스님
이것이 전도서입니다.
전도서는 이것을 더 깊고 높은 언어로 기록해 놓았습니다. 주어진 건 누리다가, 때가 되면 가자.
여러분에게 주어진 상황, 사람, 시간, 때, 이 모든 것을 하나님 앞에서 누리다가, 때가 되면 미련 없이 가자.
이것이 전도서 전체의 내용입니다.
이것을 깨달았다면 여러분은 전도서를 다 소화한 것입니다.
많은 사람이 영성을 특별한 체험으로 생각합니다. 깊이 기도하고, 많이 기도하고, 일반 사람이 잘 쓰지 않는 고상한 언어를 쓰면 아, 저 사람 영성이 깊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코헬렛 전도자가 말하는 영성은 훨씬 단순하고 실제적입니다. 먹을 것이 있으면 맛있게 먹고, 입을 것이 하나라도 있으면 진심으로 감사하며 입고, 잠을 잘 자고, 때가 되면 미련 없이 떠날 줄 아는 것입니다.
요즘 큰 교회 목사들이 자식에게 무엇을 물려주느니 하며 시끄럽습니다. 미련 없이 떠날 줄 아는 실력이 없어서 그렇습니다. 미련 없이 떠날 줄 아는 것, 그것이 영성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쉬워 보이지만 결코 쉽지 않습니다.
맛있는 것을 먹는다고 다 누리는 것은 아닙니다. 비싼 옷을 입는다고 다 그 옷을 누리는 것도 아닙니다. 밥상 앞에서 반찬이 이게 뭐야, 먹을 게 없네 하며 투덜거리는 사람은 먹고 있지만 누리지는 못하는 사람입니다. (사실 제가 그렇게 살았습니다. 이 말을 하다 보니 괜히 양심에 찔립니다.) 옷장에 옷이 가득한데도 입을 옷이 없다고 불평하는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부족해서가 아니라, 누릴 줄을 몰라서 그런 것입니다.
언젠가 우리 가족의 패딩을 인도 선교사님께 보낸 적이 있습니다. 선교사님이 너무나 감사해하셨습니다. 왜 그렇게 감사했을까요? 누릴 줄 알았기 때문입니다. 이런 귀한 것을 보내 주시다니, 정말 감사합니다. 감사하게 입는 것, 그것이 코헬렛이 말하는 누림입니다.

우리 교회의 올해 표어가 있습니다.
오늘을 선물처럼.
이 말은 오늘을 붙잡으라는 뜻이 아닙니다. 오늘을 선물 받은 것처럼 누리라는 뜻입니다. 선물은 움켜쥐고만 있는 것이 아니라 누리는 것입니다. 누군가 반지를 선물했다면, 그것을 붙들고만 있을 것이 아니라 끼고 누려야 합니다. 너무 감사하다 하면서 말입니다.
하나님은 오늘이라는 선물을 매일 우리에게 주십니다. 밥 한 끼도, 입을 옷도 그 선물입니다. 거울 앞에서 나는 무슨 복이 많아서 이렇게 입을 옷이 있나 하며 감사할 때, 비로소 그 옷을 누리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정말 누려야 할 것은 따로 있습니다. 그리고 이것을 우리는 가장 못 누립니다.
바로 사람입니다.
우리가 오늘 진짜 누려야 할 것은 사람입니다. 사람을 누려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오늘이라는 선물을 어떻게 사셨는지 생각해 봅니다. 마태복음 11장 19절은 예수님의 하루 일상을 이렇게 보여 줍니다.
마태복음 11장 19절19인자는 와서 먹고 마시매 말하기를 보라 먹기를 탐하고 포도주를 즐기는 사람이요 세리와 죄인의 친구로다
예수님을 비판하던 사람들이 그분을 두고 한 말이 먹기를 탐하고 포도주를 즐기는 자였습니다. 그만큼 예수님은 사람들과 먹고 마시는 자리를 좋아하셨습니다. 뻑하면 우리 식사 한번 할래? 한 잔 할래? 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분은 세리와 죄인의 친구였습니다. 그러면서 성경은 뒤에 아주 의미 있는 문장 하나를 남깁니다.
마태복음 11장 19절19지혜는 그 행한 일로 인하여 옳다 함을 얻느니라

정말 깊고 수준 높은 말입니다. 지혜가 무엇이라는 것입니까? 잘 먹고 잘 마시고, 감사하게 먹고 마시고, 함께한 사람들을 친구로 여기며 누렸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주님이 이 땅에서 하루를 살아가신 지혜였습니다. 주님에게 밥과 음료는 매일 받는 선물이었고, 만나는 사람들은 모두 선물이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왜 주님처럼 먹는 것도, 입는 것도, 사람도 누리지 못하고 오히려 상처받으며 살까요? 우리는 사람을 만날 때 편견의 안경을 끼고 만나기 때문입니다.
편견에 사로잡히면, 내 곁의 존재가 우연히 온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이 보내신 선물이라는 것을 볼 눈이 없어집니다. 가장 가까이 있고 가장 오래 곁에 있는 사람이, 보석보다 다이아몬드보다 귀한 존재라는 것을 보지 못합니다. 이미 편견에 오염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맛보고 누리라며 최고의 선물을 보내셨는데, 우리는 포장지도 뜯지 않고 나 이런 거 별로야 합니다. 우리에게 보내진 사람이라는 귀한 선물에 내 기대를 투사합니다. 프로젝션입니다. 그를 선물로 받아 고맙다, 감사하다 하며 누리는 것이 아니라, 내 기대를 투사하여 내가 원하는 대로 행동하라고 그에게 요구합니다.
이것은 추 집사님이 제게 선물을 보냈는데 나는 이런 거 원하지 않아 하는 것과 똑같습니다. 나를 생각하는 마음으로 선물을 보냈으면, 내게 필요하든 아니든 그 마음을 보고 감사함으로 받을 줄 알아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나는 사과를 좋아하는데 왜 배를 보내? 합니다.
하나님이 사람이라는 선물을 보내셨는데, 우리는 내 편견으로 판단합니다. 그것이 바로 선악과를 따 먹은 짓입니다. 이건 옳고 저건 틀리고. 자기가 주인 자리에 앉아 내가 원하는 선물을, 내가 원하는 대로 보내라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왕 노릇을 하고 있으니, 그 귀한 선물을 어떻게 누리겠습니까. 관계만 나빠질 뿐입니다.
사람이 선물이 되지 못하는 이유는, 그 사람이 부족해서가 아닙니다. 그를 내 욕망의 눈으로, 내 방식대로 붙들어 매려 하기 때문입니다. 아무 생각 없이 그저 누리려고만 하면, 어느 순간 눈이 열리며 그가 얼마나 귀한 선물인가 보이기 시작합니다.
제가 오래전 전라도로 이사 왔을 때의 일입니다. 영광의 한 면사무소에 신고하러 갔더니, 직원이 저를 보자마자 이렇게 말했습니다. 저쪽에서 왔습니까? 제가 전라도에 와서 처음 들은 말이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그 사람 얼굴 가까이 제 얼굴을 들이대고 이렇게 답했습니다.
나, 북쪽에서 안 왔는데.
편견의 눈으로 보면 모든 것이 구부러져 보이는 법입니다.
여러분이 저를 하나님이 우리 목사님을 보내 주셨구나 하며 있는 그대로 누리면, 저는 선물이 됩니다. 그러나 다 좋은데 경상도 사투리가 마음에 안 들어, 서울말을 하면 좋겠어 하며 제게 서울말을 기대하면, 저를 누릴 수 없습니다. 그것은 붙잡을 수 없는 것을 붙잡으려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저 역시 여러분을 누리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교회에는 이 정도 믿음과 배움이 있고, 이 정도 헌금과 실력이 있는 사람이 왔으면 좋겠다 하는 순간, 저는 여러분을 누릴 수 없습니다. 있는 그대로 귀하고 소중한 선물로 볼 때, 여러분은 제게 보석 같은 존재가 됩니다. 그러나 다른 교회 집사님들은, 권사님들은 목사한테 이렇게 한다던데 하며 기준을 들이대고 판단하기 시작하면……
여러분은 선물이 아니라 고물이 됩니다. 고물. 골치 아픕니다.
예수님께서 그 열악한 상황 속에서도 먹고 마시는 것에 감사하고 만나는 사람들을 끊임없이 누릴 수 있었던 것은, 그분에게 편견이 요만큼도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모두가 멸시하고 저런 인간은 인간도 아니야 하던 사람들, 세리와 창녀와 죄인들의 친구가 되실 수 있었습니다.
우리 교회에서도 누구나 만나고 누구와도 친할 수 있는 사람은 사회성이 넓은 사람이 아니라 편견이 없는 사람입니다. 나는 딱 맞는 사람들만 만날 거야 한다면, 그것은 편견이 있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모든 사람을 아무렇지 않게 볼 수 있어야, 그 사람이 선물로 바뀝니다.
주님께서는 편견이 없었기에 죄인과 세리의 친구가 되셨고, 간음한 여인을 만나도 정죄하지 않고 그 편이 되어 주셨습니다. 남편을 여섯이나 둔 수가성 여인을 만났을 때도 너는 천박한 짓을 했구나 하지 않으시고, 편견 없이 그 고단한 삶을 바라보며 만나 주고 안아 주셨습니다. 몸을 팔고 살던 막달라 마리아도 아낌없이 축복하시니, 마리아는 끝내 옥합을 깨뜨려 주님의 장례를 준비하는 삶을 살아냈습니다.
내 옆에 있는 이 사람, 오늘 내가 만난 이 사람이 하나님이 주신 가장 소중한 선물임을 알고 사는 것, 그것이 헤벨의 영성의 최고봉입니다.
그것을 누릴 수 있다면 여러분은 전도서를 뗀 것입니다.
그런데 이 설교를 준비하다가, 저는 이런 질문이 나올 수 있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저 같은 사람이라면 틀림없이 이렇게 물을 것입니다. 목사님, 사람이 선물이라면, 누가 봐도 악한 짓을 일삼는 그 사람도 제게 선물입니까? 제게 모진 고통과 상처를 준 이 사람도 선물이라는 뜻입니까? 그런 사람은 도대체 어떻게 누려야 합니까?
저는 가끔 이런 말을 합니다. 나는 내 인생을 영화처럼 생각한다. 그래서 영화 같은 삶을 살게 해 달라고 기도하라고 권합니다. 그런데 이 말을 들으면 많은 사람이 오해합니다. 좋은 일만 생기고, 행복한 일만 생기고, 모든 일이 잘되는 삶을 떠올립니다.
그러나 한번 생각해 봅시다. 행복만 나오는 영화가 있습니까? 영화에는 무수한 사연이 있고, 반드시 지독한 악당이 등장합니다.
영화처럼 산다는 것은 이런 뜻입니다. 누군가 내게 모진 말을 할 때, 이렇게 생각해 보는 것입니다.
야, 연기 잘하네. 악역 연기 진짜 잘한다.
어쩌면 저렇게 못된 대사를 찰지게 할까. 저 사람 연기하는 게 진짜 같네. 그 사람이 지금 대본에 쓰인 악역의 대사를 읊고 있다고 여기며 바라보는 것입니다.
신기하게도, 그러면 덜 미워집니다. 한번 해 보십시오. 안 미워진다고는 하지 않았습니다. 덜 미워집니다. 우리 뇌는 신기하게도 잘 속습니다. 그것이 자극과 반응 사이의 공간을 넓히는 방법입니다.

예를 들어 남편이 기분 나쁜 말을 했다고 합시다. 그때 저 인간 또 내 속을 터지게 하네 하는 대신, 속으로 이렇게 생각하는 것입니다. 아이고, 대사도 참 찰지게 한다. 어쩜 저렇게 밉상스럽게 할까. 진짜 연기 잘하네. 악역 하느라 고생이 많다, 저 사람도.
현실의 말을 붙잡고 같이 폭발하는 것이 아니라, 그 말을 영화의 한 장면처럼 누릴 수 있다면 미움은 차츰 불쌍함으로 바뀝니다. 이건 제가 직접 겪은 이야기입니다. 저 사람 지금 악역 대사를 읊고 있구나 생각하면, 미워지기는커녕 갈수록 불쌍한 마음이 더 들어옵니다.
악역 없는 영화가 어디 있습니까. 좋은 사람만 나오는 영화를 보신 적이 있습니까? 주인공이 연기하는데 악역이 거칠게 몰아붙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연기인 줄 모르고, 주인공이 같이 열받아 자기 대사를 잊은 채 함께 욕하고 싸우기 시작합니다. 그런 드라마를 막장이라 합니다. 그게 막장입니다.
혹시 우리는 지금 막장 드라마를 찍고 있지 않습니까? 상대가 악역을 맡아 악한 말을 한다고 해서, 우리도 똑같이 악한 말로 받아치며 살고 있지는 않습니까? 아니면 은혜 가운데 말하고 소금으로 맛을 낸 것 같은 말로 주인공답게 말하며, 하나님이 주신 시나리오 그대로 한 편의 영화를 만들어 가고 있습니까?
악한 자가 자기 대본의 역할을 한다 해도, 우리는 그것을 연기로 여기고 하나님이 주신 시나리오대로 살아야 합니다. 그렇게 하나님이 감독하시는 영화의 주인공으로 자라 갈 때, 천사들은 우리가 찍는 그 영화를 보며 하늘에서 눈물을 흘리고 감동합니다.
악역이 없으면 주인공은 성장하지 않고, 방해가 없으면 영화의 서사는 깊어지지 않습니다. 방해가 강할수록, 그 강한 데서도 주인공이 주인공답게 살아낼 때 서사는 깊어집니다. 내 인생이 너무 허무해라고 말하는 것은, 서사가 없어서, 감정이 없어서 그런 것입니다.
악역은 주인공을 무너뜨리려 오지 않고, 주인공을 주인공답게 만들려 옵니다.
제가 내 인생을 영화처럼 본다고 할 때, 그것은 해피엔딩으로 끝난다는 말만으로 다 설명되지 않습니다. 물론 영화는 해피엔딩으로 끝나겠지요. 저는 예수님과의 결혼으로, 그분과 영원한 신혼여행을 떠나는 그 결말을 이미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결혼에 이르기까지 무수한 반대와 아픔과 실패와 넘어짐이 있다는 것도 압니다. 수많은 악역이 그분의 신부답지 못하게 만들려고 갖은 행위를 할 것입니다. 이 세상을 사는 동안은 말입니다.
예수님을 십자가로 몰아간 사람들도 다 악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악함이 어떻게 되었습니까? 오히려 완벽한 구원의 서사가 되지 않았습니까. 우리 인생도 그렇게 됩니다. 그것이 우리 그리스도인의 멋스러운 인생이고, 영화 같은 인생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헤벨의 영성은 인생의 한 장면 한 장면을 영화처럼 살아가는 영성입니다. 물론 제가 붙인 말이지만, 저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헤벨의 영성이란 영화구나.
수십 년 후 나는 이런 사람이 될 거야 하고 멀리만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오늘 하루를 너무도 귀하고 소중하게 볼 줄 아는 것. 그것이 헤벨의 영성입니다.

오늘 내가 만난 사람, 오늘 내가 보는 하늘, 오늘 내가 느끼는 햇살, 오늘 내가 입고 있는 옷, 조금 이따 점심에 먹을 맛있는 음식.
이 하나하나에 하나님의 눈길과 손길이 담겨 있음을 느끼면서, 아, 사랑하는 이들을 통해 보내신 하나님의 선물이구나 하고, 선물의 포장지를 뜯듯 밥 한 숟가락을 먹고, 사람을 보고, 하루를 누리며 살아가는 것, 그것이 헤벨의 영성입니다.
이것만 소화하면 전도서 12장까지 다 다룰 필요가 없습니다. 저는 오늘 이 설교 하나로 마쳐도, 전도서가 여러분에게 충분히 전해졌다고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