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범사에 기한이 있고 천하 만사가 다 때가 있나니
우리 삶에는 끝내 이해되지 않는 일들이 있습니다. 아무리 설명하려 해도 설명되지 않고, 아무리 이유를 찾으려 해도 끝내 답을 얻지 못하는 자리들이 있습니다. 오늘 본문인 전도서 3장은 바로 그 자리를 우리에게 보여 줍니다.
전도서 3장을 보면 '때'라는 말이 스물여덟 번이나 반복됩니다. 전도자는 서로 반대되는 일들을 나란히 놓습니다. 날 때와 죽을 때, 심을 때와 뽑을 때, 울 때와 웃을 때, 사랑할 때와 미워할 때.
전도서 3:2-82날 때가 있고 죽을 때가 있으며 심을 때가 있고 심은 것을 뽑을 때가 있으며
3죽일 때가 있고 치료할 때가 있으며 헐 때가 있고 세울 때가 있으며
4울 때가 있고 웃을 때가 있으며 슬퍼할 때가 있고 춤출 때가 있으며
5돌을 던져 버릴 때가 있고 돌을 거둘 때가 있으며 안을 때가 있고 안는 일을 멀리 할 때가 있으며
6찾을 때가 있고 잃을 때가 있으며 지킬 때가 있고 버릴 때가 있으며
7찢을 때가 있고 꿰맬 때가 있으며 잠잠할 때가 있고 말할 때가 있으며
8사랑할 때가 있고 미워할 때가 있으며 전쟁할 때가 있고 평화할 때가 있느니라
삶의 양 끝을 오가듯 이 모든 때를 이어 놓으며, 전도자는 우리에게 한 가지를 묻습니다.
이 모든 때를 통해, 하나님은 우리에게 무엇을 말씀하고 계시는가.
2절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날 때가 있고 죽을 때가 있다. 여러분에게 하나를 고르라면, 태어날 때가 좋습니까, 죽을 때가 좋습니까? 개똥밭에 굴러도 이승이 저승보다 낫다고들 합니다. 아무리 힘들어도 죽는 것보다는 사는 것이 낫다, 대체로 사람들이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런데 전도자 코헬렛은 우리가 가진 상식과 정반대되는 쪽에 손을 들어 줍니다.
전도서 7:11좋은 이름이 좋은 기름보다 낫고 죽는 날이 출생하는 날보다 나으며
전도서 7:22초상집에 가는 것이 잔칫집에 가는 것보다 나으니 모든 사람의 끝이 이와 같이 됨이라 산 자는 이것을 그의 마음에 둘지어다
죽는 날이 태어난 날보다 낫고, 초상집에 가는 것이 잔치집에 가는 것보다 낫다. 이것을 문자 그대로 읽어 사는 것보다 죽는 게 낫다는구나, 성경이 그랬잖아 하고 몰아붙이면, 그것은 사람을 허무주의로 떨어뜨리는 길입니다. 전도자는 다른 관점에서 말하고 있고, 그 말의 속살을 들여다보면 아주 깊은 통찰이 담겨 있습니다. 코헬렛은 의도적으로 죽음을 끌어들입니다. 왜 그럴까요? 전도서는 늘 같은 방식입니다. 죽음을 끌어들여 삶을 설명하려는 것입니다.
죽음만큼 삶을 정직하게 보게 하는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죽음 앞에 설 때에야 비로소 삶이 무엇인지를 보게 됩니다. 잔치집에는 무엇이 있습니까? 비교가 있고, 경쟁이 있고, 꾸미고 가식하는 것이 있습니다. 얼마 전 제가 아는 한 병원 원장님 자녀가 서울 신라호텔에서 결혼식을 했는데, 한 시간도 안 되는 그 예식에 비용이 일억이 넘게 들었다고 합니다. 가식 아닙니까? 잔치집에는 늘 이런 가시가 있습니다.
그러나 초상집은 이 모든 것을 멈추게 하고, 우리가 살아온 인생의 실상을 그대로 보여 줍니다. 그곳에 가면 더 잘난 것도 없고, 더 잘나가는 것도 없습니다. 더 많이 가졌다는 것이 거기서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아, 이게 그냥 비눗방울이었구나. 만지면 툭 터지는 것이었구나. 오색 무지개처럼 멋져 보였는데, 이거 아무것도 아니었네. 이것을 어디서 발견합니까? 장례식에 가면 발견합니다.
그러니 죽음이 삶보다 낫다는 말은, 숫자로나 무게로 더 낫다는 뜻이 아닙니다. 삶을 정직하게 직시하게 한다는 그 측면에서의 나음입니다.
1절은 범사에 기한이 있고 천하 만사가 다 때가 있다고 말합니다. 저는 이 말씀을 그동안 이런 설교로 많이 들었습니다. 때를 잘 분별해라. 이런 때가 있고 저런 때가 있으니, 때가 오기 전에 잘 분별하며 살아라. 그런데 이 말씀은 그런 뜻이 아닙니다.
이런 때가 있고 저런 때가 있으니 미리 분별하라는 말이 아니라, 우리가 선택하지 않은 이런 때들이 우리 삶에 무조건 찾아온다는 것입니다. 분별을 잘한다고 안 옵니까? 잘하든 못하든, 이런 때는 우리 삶에 반드시 찾아옵니다.
그러니까 이 유명한 구절이 말하는 것은 지혜로운 타이밍의 기술이 아닙니다. 우리 인생이 우리가 통제할 수 있는 범위 밖에 나가 있음을, 지금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태어날 때와 죽을 때, 얻을 때와 잃을 때, 웃을 때와 슬플 때가 내가 원하고 선택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나와 상관없이 어느 날 불쑥 찾아옵니다. 그냥 비를 맞듯이 우리 인생에 주어지는 것입니다.
우리는 인생에서 일어나는 이 모든 일을 내가 판단하고 선택해서 살아가는 존재가 아닙니다. 우리는 맞이할 수밖에 없는 존재입니다. 야, 네가 그렇게 하니까 그렇게 됐지. 우리는 쉽게 그렇게 말하지만, 크게 보면 일어나는 일들은 우리가 선택으로 만들어 낸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무언가를 창조하며 만들어 내는 존재가 아니라, 받아들이며 사는 존재입니다.
내가 인생을 만든 것 같지만, 사실 인생은 되어지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이 단비내리는교회를 선택했다고 생각하십니까? 목사님도 괜찮고 이 교회가 본질을 추구하는 것 같으니 나는 여기 다녀야지, 그렇게 스스로 골랐다고 여기시겠지만, 그 이면을 들여다보면 여러분은 다 떠밀려 온 것입니다. 여러분의 선택이 아니라, 선택할 수밖에 없는 떠밀림의 파도가 여러분을 이곳에 데려온 것입니다. 하나님이 어떤 상황을 통해 여러분을 여기까지 떠밀어 오게 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전도서 3장이 보여 주는 것은, 삶이 이렇게 왔다 갔다 하니 균형을 잘 잡으라는 말이 아닙니다. 애석하게도 이 본문은 우리가 원하는 답을 주는 대신, 삶의 한계를 보여 줍니다.
11절을 보면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사람으로 측량할 수 없게 하셨다고 합니다.
전도서 3:1111하나님이 모든 것을 지으시되 때를 따라 아름답게 하셨고 또 사람들에게는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셨느니라 그러나 하나님이 하시는 일의 시종을 사람으로 측량할 수 없게 하셨도다
쉽게 말하면, 사람은 한계 안에서 살도록 만들어졌다는 뜻입니다. 우리는 자꾸 알려고 하고, 하나님, 이것만 보여 주시면, 이것만 알게 해 주시면 하고 매달립니다. 그런데 설명해 준들 우리가 알겠습니까?
제가 키우는 지렁이에게 일 더하기 일은 이라고 아무리 설명한들, 지렁이가 알아듣겠습니까? 인생에 일어나는 일들을 하나님이 우리에게 설명해 준들, 우리가 알아듣겠습니까? 사람도 설명해도 모르는 사람이 천지인데, 하물며 하나님의 일을 사람에게 어떻게 다 설명하겠습니까. 설명해 줘도 알아듣지 못합니다. 우리는 그런 한계를 안고 사는 존재입니다.

전도서 3장뿐 아니라 전도서 전체가 인간을 어떻게 그리는가 하면, 마치 구멍 뚫린 항아리처럼 그립니다. 부어도 부어도 채워지지 않고 줄줄 새는, 허무한 존재로 그려 놓습니다.

그런데 저는 가끔 이런 분들을 만납니다. 예수를 믿으면 우리 안의 모든 공허가 사라지고, 잘 믿으면 주님으로 가득 차서 아무 부족 없이, 어떤 공허도 느끼지 않고 살 수 있다. 이렇게 말하는 사람을 많이 봅니다. 거짓말입니다.
거짓말입니다. 예수 잘 믿으면 우리 안의 모든 공허가 사라진다고요? 외로움이 없어진다고요? 새빨간 거짓말입니다. 그건 불가능한 이야기입니다.
저는 나름 몸부림치며 주님 믿고 살아왔지만, 제 공허가 채워진 적이 한순간도 없습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 믿고 나서도, 심지어 목사로 살아가는 지금도 제 안에는 답답함이 여전하고, 설명되지 않는 불편함이 도사리고 있습니다. 평화, 평화로다, 하늘에서 내려온다, 가끔 그 평화를 맛보긴 합니다. 그러나 그 평화가 제 안에 늘 있지는 않습니다.
어떤 날은 기분이 좋았다가 어떤 날은 우울하고, 아침에는 맑았는데 저녁에는 흐리고, 어떤 날은 만나는 사람이 다 보석처럼 귀하다가 어떤 날은 사람만 만나면 피곤해집니다. 마음에 감사밖에 없는 날이 있는가 하면, 짜증으로 가득한 날도 있습니다. 그것이 솔직한 제 고백이고, 제 실상입니다.
지난주일 예배가 끝나고 솔 집사가 가면서 저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목사님, 오늘 설교가 제 인생 설교였습니다. 저는 그 말을 듣고 기분이 좋아져서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그래, 나는 백 년에 하나 날까 말까 한 목사가 틀림없어. 그러고는 한껏 행복해했습니다. 그런데 그날 예배 후에 같이 밥을 먹는데, 솔 집사가 이러는 겁니다.
목사님, 오늘 설교 말씀도 참 좋았지만, 저번 주 설교가 최고 좋았던 것 같아요.
저는 그 말에 급격히 우울해졌습니다. 아, 오늘 설교가 별로였구나. 이렇게 기분이 오르내리는 증상을 정신의학에서 뭐라고 하는지 아십니까? 바이폴라 디스오더, 우리말로 하면 조울증입니다. 양극성 장애라고도 하지요.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우리는 다 조울증을 앓고 있습니다.
저와 아주 절친한 정신과 원장님이 이런 말을 했습니다. 정신병이 있느냐 없느냐는 질적인 문제가 아니라, 얼마나 있느냐는 양적인 문제다. 그러니까 정신병은 다 있다는 겁니다. 우리는 다 정신질환을 앓고 있는데, 얼마나 앓고 있느냐에 따라 정상과 비정상으로 나뉠 뿐이라는 것입니다.
사람은 자기의 진짜 모습을 이야기해 주면 자존심이 상해서 기분 나빠합니다. 외모가 못난 사람에게 못났다 하면 성이 나고, 머리 나쁜 사람에게 돌대가리라 하면 기분 나빠합니다. 평생 하는 일이 자기를 위장하고 포장하는 것이라, 진짜 자기 모습을 보여 주면 견디지 못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자신을 생각할 때 대단히 정상적이라고 여기십니까?
전도서 9:33모든 사람의 결국은 일반이라 이것은 해 아래에서 행해지는 모든 일 중의 악한 것이니 곧 인생의 마음에는 악이 가득하여 그들의 평생에 미친 마음을 품고 있다가 후에는 죽은 자들에게로 돌아가는 것이라
모든 사람의 결국은 일반이라, 곧 모든 사람이 똑같다는 말입니다. 이 말은 모든 사람이 미친 마음을 품은 채 살다가 죽더라는 뜻입니다. 성경은 저와 여러분을 이렇게 규정합니다. 그래서 저는 예전에 여러분에게 이 지구별이 거대한 정신병원 같다고 말한 것입니다. 그냥 제가 지어낸 말이 아니라, 성경의 관점으로 보니 이 지구별이 정신병원 같더라는 것입니다.

성경은 우리를 뭐라고 합니까? 죄인이라고 합니다.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고 하니, 우리 모두가 죄인이라는 말 아닙니까. 그런데 죄인은 법적 용어입니다. 이 법적 용어를 의학 용어로 바꾸면 무엇이 됩니까? 환자입니다. 저와 여러분은 다 아픈 환자입니다. 정상처럼 보여도 우리는 다 질병을 앓고 있습니다. 육체의 질병만이 아니라, 우리 안에는 정신질환적인 요소가 다 있습니다.
우리는 자꾸 내가 잘못하지 않았다고 하고 싶어 하는데, 잘못된 존재이기 이전에 우리는 망가진 존재라는 사실을 인정해야 본질을 향해 갈 수 있습니다. 가만히 자신을 보십시오. 이유 없이 화가 나지 않습니까? 화낼 일이 아닌데도 화를 내고, 누가 지나가며 툭 던진 말을 밤새 곱씹으며 잠 못 이룹니다. 그러다 누가 칭찬 한번 하면 이틀 사흘을 들뜹니다. 사람을 사랑한다면서 얼마나 통제하려 듭니까. 용서했다면서 받은 상처를 무의식에 붙들고 삽니다. 저는 다 잊었습니다 하는 말, 저는 안 믿습니다. 겉으로는 단정해 보여도 우리 속을 들여다보면 온갖 정신질환의 소음이 가득합니다.
예수 안에서 자기를 본 사람은 이런 자신의 모습을 보게 됩니다. 그리스도인은 나는 아프지 않습니다, 나는 건강하고 정상입니다 하고 말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오히려 나는 환자입니다, 나는 아픈 사람입니다, 한계가 있습니다, 은혜 없이는 안 됩니다 하고 고백하는 사람입니다.
이것을 인정한 사람에게만 신약과 구약이라는 약이 처방됩니다. 구약은 우리의 병이 얼마나 깊은지를 끊임없이 말하는 책이고, 신약은 도무지 고칠 수 없는 이 불치병을 앓는 우리에게 이 병을 고칠 의사가 딱 한 분 계시다고 소개하는 책입니다. 그래서 신약과 구약이 우리에게 다 필요합니다. 치료받는 사람에게 나타나는 한 가지 특징이 있는데, 죄에 민감해지는 동시에 자기 한계를 통감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걸 말해야 할지 모르겠는데, 제게 아무도 모르는 비자금 봉투가 하나 있습니다. 병원에서 일하며 얻는 수입 말고 다른 데서 들어오는 돈을 그 봉투에 담아 둡니다. 오늘도 1부 예배 때, 아흔 넘으신 허리 굽은 집사님이 나가시면서 목사님, 명절 용돈요 하고 봉투를 하나 쥐여 주셨습니다. 병원에 입원한 환자 가족이 감사하다며 놓고 가는 것도 있고, 상담받은 분이 놓고 가는 것도 있고, 집회에 가서 받는 사례비도 그 봉투에 들어갑니다.
그 봉투에 담긴 돈은 개인적인 용도로는 쓰지 않겠다고 스스로 정했습니다. 형편이 어려운 목사님이나 선교사님을 만나면 드리기도 하고, 여러분에게 맛있는 밥을 사기도 하고, 그런 데 씁니다.
그런데 얼마 전에, 십이 년 넘은 제 차를 광택 내고 유리코팅이라는 걸 오십만 원 들여 했더니, 정말 새 차가 되어 기분이 참 좋았습니다. 문제는 그다음이었습니다. 그 값을 치러야 하는데, 갑자기 그 비자금 봉투에서 꺼내 쓰고 싶은 겁니다. 그래서 봉투를 열어 오십만 원을 끄집어냈습니다.
그런데 돈을 꺼내는 순간, 제 손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이 손이 왜 이렇게 비루하게 보일까요?
아, 이거 참 비루하네 싶어 도로 봉투에 집어넣었습니다. 그런데 넣고 나니 또 이런 생각이 듭니다. 내가 약속한 것도 아니고 그냥 혼자 정한 규칙인데, 이거 너무 율법적인 거 아니야? 내가 수고해서 번 돈을 내 차에 쓰는 게 뭐가 문제야. 교회에서 사례비도 안 주는데 이거라도 써야지. 그래서 다시 오십만 원을 꺼냈습니다. 꺼내니 또 이런 생각이 듭니다. 돈이 없는 것도 아닌데 꼭 이 돈을 써야 하나? 내가 너무 구질구질하다. 그래서 다시 집어넣었습니다. 넣었다 뺐다, 넣었다 뺐다 했습니다.

여러분에게는 이 모습이 어떻게 보입니까? 우리 목사님도 별거 아니구나 싶어 비루해 보입니까, 아니면 아, 나하고 똑같네 싶어 위안이 됩니까? 저는 바로 이 모습이야말로 우리 인간의 본질이라고 생각합니다. 여러분이 아무리 경건한 척 앉아 있어도, 저는 여러분과 제가 다를 바 없다고 믿습니다.
그런데 여기가 중요합니다. 돈을 넣었다 뺐다 하는 이 행동을, 사람의 경건이라는 잣대로 재면 구질구질해 보이지만, 영적인 눈으로 보면 그것은 비루함이 아닙니다.
죄에 대한 이 예민함은 제 신앙이 약해서 생기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제가 치료가 진행 중인 사람이라는 것을 드러내는 증거입니다. 영적으로 깨어 있는 사람에게만 나타나는 표시입니다. 제가 죽어 있는 목사였다면 오십만 원을 빼서 그냥 쓰고 말았을 겁니다. 내가 번 돈 내가 쓰는데 뭐가 문제야. 아무 감각이 없는 것은 건강한 것이 아닙니다. 자기의 못남과 한계와 아픔을 느끼는 것, 그것이 치료의 시작이고 회복의 시작입니다.
우리는 이 지구별이라는 거대한 정신병원, 그 안의 시간이라는 병실에서 지금도 입원 치료를 받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언제 퇴원할까요? 죽는 날, 그날이 우리의 퇴원 날입니다. 그날까지 우리는 이런 정신질환적인 요소를 안고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 한국교회 성도들이 진리라고 믿는 거짓말이 하나 있습니다. 너무 많은 사람이 이건 틀림없는 진리라고 믿는 거짓말인데, 그게 무엇인지 아십니까? 기도하면 다 돼. 기도가 부족해서 그래. 기도가 답이야. 우리는 이 거짓말을 너무도 진리처럼 믿고 있습니다. 무슨 기도가 만병통치약입니까? 다들 기도해 보지 않으셨습니까? 무수히 몸부림치며 기도했지만, 기도가 다 답이었습니까?
모든 문제를 기도로 풀려는 이 행태는 신앙이 좋은 것이 아닙니다. 제가 볼 때 이것은, 기독교가 이 땅에 들어올 때 수천 년 뿌리박힌 무속신앙과 뒤섞이면서 생긴 것입니다. 복음이 무속과 짜깁기되어 아주 정체불명의 종교 하나를 만들었는데, 그 정체불명의 종교를 기독교라 믿고 사는 사람이 참 많습니다. 삶의 모든 문제를 기도로 해결하려는 것은, 제가 볼 때 우리 기독교 신앙의 가장 큰 병입니다. 그런데 이 병은 고치기가 어렵습니다. 왜냐하면 너무 믿음 좋아 보이기 때문입니다.
주관적일 수는 있지만, 저는 이렇게 느낍니다. 기도, 기도하는 사람 치고 정말 믿음 좋은 사람 별로 못 봤습니다. 기도, 기도하는 사람 치고 성격 좋은 사람은 더 못 봤습니다. 기도, 기도하는 사람 치고 행복한 사람은 더더욱 못 봤습니다. 뭔가 늘 불안해합니다.
성숙한 신앙은 기도로 모든 문제를 해결하는 신앙이 아닙니다. 해결되지 않는 인생의 모호함과 한계 안에서도, 이 모든 것을 다 아시고 다 보시고 이 모든 것 너머에 계신 그분을 신뢰하는 것이 성숙한 신앙입니다. 그분을 이용해 내 한계를 벗으려는 것은 샤머니즘이지 기독교 신앙이 아닙니다.
기도는 현실을 지워 내는 능력이 아니라, 현실을 직면하게 하는 은혜입니다.
기도는 문제를 없애는 능력이 아니라, 문제를 문제로 보지 않게 하는 힘입니다. 왜 문제가 문제로 보이지 않을까요? 기도하면 하나님이 가까워지고, 하나님이 가까워지면 그분이 내 문제보다 훨씬 크신 분임을 느끼게 되어, 나를 가로막던 철옹성 같은 문제가 아, 별거 아니네 하고 보이게 되기 때문입니다.
저와 여러분은 지금도 수많은 아픔과 고통을, 우리 힘으로는 어쩔 수 없는 문제를 만나며 신음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만나는 이런 한계는 기도가 부족해서도 아니고, 하나님 앞에 잘못 살아서도 아니고, 불순종해서도 아닙니다. 이것이 바로 인생의 본질입니다.
아프고 병들었다가 좋았다가, 힘들었다가 웃었다가 울었다가, 사랑했다가 다투었다가, 선을 행하다 넘어지기도 하고. 그게 우리 인생의 본질입니다. 아무리 몸부림쳐도 우리는 그곳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전도서 3:1010하나님이 인생들에게 노고를 주사 애쓰게 하신 것을 내가 보았노라
힘듦과 고통을 누가 주셨다고요? 하나님이 주셔서 우리를 애쓰게 하셨다고 합니다. 벗어날 수 없는 이 삶의 무게, 이 한계는 우리가 기도가 부족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이 주신 것이라고, 이 지혜자가 말합니다.
그러면 우리는 따져야 하지 않겠습니까? 왜 이런 것을 주셨습니까? 좋은 것을 주시면 될 텐데, 왜 노고와 애씀을 주셨습니까? 여러분, 이것이 없으면 우리 인간이라는 종자는 죽었다 깨어나도 영혼을 사모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등 따습고 배부르면 절대로 영혼을 사모하지 않습니다. 변화산에서 베드로가 주님, 우리 여기서 삽시다 했던 것처럼, 살 만하면 그 자리를 떠나려 하지 않습니다.
지금 암 투병 중인 미정 집사가 이런저런 증상으로 힘든 시간을 지나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제 입에서 저도 모르게 이런 말이 터져 나왔습니다. 아이고 주님, 빨리 오십시오. 다 귀찮습니다. 우리는 한계를 만날 때 비로소 영혼을 봅니다. 내 삶이 살 만한 동안에는 그 나라와 그 의를 구하지 않습니다. 그 영원한 나라를 향해 소망의 눈길을 돌리지 않습니다. 나는 눈길이 잘 안 간다고요? 아직 살 만한 것입니다.
우리는 한계를 만날 때에야 그 창문의 손잡이를 잡습니다. 인생을 살며 만나는 그 모호함과 답답함과 채워지지 않는 느낌은, 하나님이 우리를 괴롭히려고 주신 것이 아닙니다. 우리 영혼이 오직 그 나라, 그분이 계신 존귀한 보좌를 바라보게 하려는 하나님의 장치이며, 하나님이 만드신 지혜입니다.

전도서 3:1111하나님이 모든 것을 지으시되 때를 따라 아름답게 하셨고 또 사람들에게는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셨느니라 그러나 하나님이 하시는 일의 시종을 사람으로 측량할 수 없게 하셨도다
저는 채워지지 않는 이 욕구를 붙들고 몸부림치며 살아왔습니다. 그러다 어느 날, 이 모든 채워지지 않는 욕구로부터 자유로워지는 한 체험을 했습니다. C.S. 루이스의 책을 읽다가였습니다. 제가 자주 소개하는 『순전한 기독교』에 나오는 대목입니다.
내 안에 이 세상 그 무엇으로도 채워지지 않는 욕구가 있다면, 나는 다른 세상을 위해 만들어진 사람일 가능성이 아주 크다.
C.S. 루이스, 『순전한 기독교』
이 글을 읽는데, 제 안의 모든 어둠과 무거운 짐이 사라지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아, 그래서 내가 이렇게 몸부림쳐도 이 세상 사는 것이 마치 맞지 않는 옷을 입은 것처럼 불편하고 답답했구나. 내가 이 세상을 위해 만들어진 존재가 아니라 저분의 나라에 맞게 지어진 존재여서, 이 땅 사는 것이 이토록 불편했구나. 그러고는 무릎을 탁 쳤습니다.

여러분이 말씀대로 살아 내려고 그렇게 몸부림쳐도 이 세상 사는 것이 자꾸 불편하다면, 그것은 여러분의 신앙이 없어서도, 기도가 부족해서도 아닙니다. 여러분이 다른 세상을 위해 만들어진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오히려 행복한 일입니다. 혹시 아, 이 세상 너무 좋아 하는 분이 계신다면, 회개하시기 바랍니다. 그런 분이 있으면 저한테 말씀해 주십시오. 제가 진짜 기도해 드리겠습니다. 주님, 저분이 기도하는 것마다 하나도 응답되지 않게 하시고, 반대로만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여러분의 영혼을 위해서 그렇게 기도해 드리겠습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서 성공했든 못 했든, 가졌든 못 가졌든, 배웠든 못 배웠든 다 떠나서, 이 세상이 불편한 존재여야 합니다. 불편할 수밖에 없습니다. 자유자가 정신병원 안에서 어떻게 자유롭겠습니까?
며칠 전 예배 사역자로 유명한 장종택 목사님에게 전화가 왔습니다. 미국에 있던 아내가 잠깐 나왔다며, 그 부부와 스피커폰으로 삼십 분쯤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대화 말미에 장 목사가 저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목사님, 예수 안 믿고 어떻게 살까요? 주님 안 믿고 어떻게 살지요?
전화를 끊고 나서도 그 말이 제 뇌리에 계속 맴돌았습니다. 이 말 안에는 무엇이 담겨 있습니까? 이것은 단순한 신앙 고백이 아니라, 어쩌면 버티다 버티다 나온 한숨 같은 말이었습니다. 현실을 살아 내야 하는 불안과 고단함, 뜻대로 되지 않는 사역, 노력해도 채워지지 않는 수많은 상황, 사명과 현실 사이에서 마주하는 고통, 그런 것들이 그 말 안에 다 담겨 있었습니다. 저에게는 그 고백이 이렇게 들렸습니다.
목사님, 저는 예수 없이 못 살겠습니다. 여기는 제 나라가 아닌 것 같습니다. 저는 진짜 예수 없이 살 자신이 없습니다.
이 말은 신앙이 약해서 나온 말이 아닙니다. 세상을 진짜 충분히 겪어 본 사람, 이 세상을 정직하게 살아 낸 사람의 입에서만 나오는 말입니다.
전도서는 우리를 허무 속으로 몰고 가는 책이 아닙니다. 전도서가 우리를 허무로 데려가는 것처럼 보이는 이유는, 이 세상은 아무것도 아니니 하늘만 보고 살아라 하며 우리를 이 땅에서 허무주의자로 살게 하려는 것 같아서입니다. 그러나 아닙니다. 하나님은 이런 것들을 거쳐 우리가 진심 담긴 한 고백을 하기를 원하십니다.
전도서는 허무주의를 말하는 책이 아니라, 우리로 하여금 이 고백을 할 수밖에 없도록 하는 책입니다. 하나님은 이 고백을 하게 하시려고, 이 세상에서 우리에게 수많은 허무와 결핍을 허락하십니다. 우리가 얼마나 그리스도 안에서 의롭게 된 존재인지를 보이시려고 끝없이 우리의 죄인 됨을 강조하시듯, 이 세상의 허무를 통해 우리가 하나님 나라만 바라보게 하시려고 이 책을 주신 것입니다.
세상을 살아갈수록, 주님, 저는 주님 없이 안 되겠습니다. 한순간도요. 이 고백이 저와 여러분에게 진심으로 터져 나오는 은혜가 있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