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너는 하나님의 집에 들어갈 때에 네 발을 삼갈지어다 가까이 하여 말씀을 듣는 것이 우매한 자들이 제물 드리는 것보다 나으니 그들은 악을 행하면서도 깨닫지 못함이니라
오늘은 우리 교회가 스물두 번째 생일을 맞이하는 날입니다. 아울러 민족의 역사 속에서 뜻깊은 삼일절이기도 합니다. 삼일절은 일제의 압제에 맞서 자유와 독립을 외친 거룩한 날입니다. 이 해방의 정신이 흐르는 날에 우리 교회를 이 땅에 세워 주셨습니다. 죄에 매여 탄식하는 이 세상 한복판으로 저와 여러분을 부르시고 섬기게 하셨습니다. 여기에 하나님의 참으로 깊고 선하신 뜻이 있지 않겠습니까. 저는 오늘 이 은혜를 마음 깊이 새겨봅니다.
자, 이제 전도서 5장의 말씀으로 들어갑니다. 저는 전도서 5장을 가리켜 '솔로몬의 행복학 강좌'라고 감히 부르고 싶습니다. 솔로몬은 이 강좌를 열면서 말을 빙빙 돌리지 않습니다. 첫 문장에서부터 우리의 가슴 한복판을 향해 강렬한 돌직구를 던집니다.
우리는 흔히 행복을 어떻게 정의합니까. 내가 바라고 원하는 소중한 것들을 어떻게든 손에 쥐어야만 행복해진다고 생각하지 않습니까. 그러나 솔로몬이 선포하는 진리는 정반대입니다. 우리가 바라는 무언가를 손에 쥐고 소유하는 데 참된 행복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솔로몬은 오직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 속에 참된 행복이 걸려 있다고 말합니다.
행복은 얼마나 많이 가졌느냐의 문제에 있지 않습니다. 하나님과 내가 지금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느냐, 바로 그 관계의 깊이에 달려 있습니다.
솔로몬은 이 강좌의 첫 문을 이렇게 엽니다. "너는 하나님의 집에 들어갈 때에 네 발을 삼갈지어다."
여기서 '하나님의 집'이란 구약 성경에서 제사를 드리는 장소를 뜻합니다. 그러나 히브리 사람들의 사고 속에서 이 장소는 단순히 눈에 보이는 건물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의 거룩한 임재가 있는 곳, 곧 하나님 바로 앞에 서는 경건한 자리를 뜻했습니다.
그리고 성경에서 '발'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바로 우리 삶의 여정 전체를 나타냅니다. 발에는 살아온 삶의 흔적이 그대로 남을 수밖에 없지 않습니까. 하루 종일 세상을 걸어 다니다 보면 발에는 온갖 먼지도 묻고, 흙도 묻고, 오물도 묻어납니다. 그래서 옛 사람들은 손님이 오면 가장 먼저 발을 씻겨 주었습니다. 발을 보면 그 사람이 어디를 다녀왔는지, 어떤 길을 밟으며 살아왔는지가 그대로 다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하나님의 집에 들어갈 때에 네 발을 삼갈지어다" 하시는 이 말씀은 무슨 뜻이겠습니까. 하나님을 만나기 전에 먼저 네 지나온 삶을 가만히 돌아보라는 뜻입니다. 하나님 앞에 서기 전, 네 자신의 영혼과 삶의 자리를 삼가 살피고 오라는 선포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성도들의 모습은 어떠합니까. 하나님 앞에 나올 때 스스로를 삼가 살피기보다는, 무언가를 손에 잔뜩 쥐고 들어오는 것을 더 좋아하는 것 같습니다. 봉사라는 제물을 들고 오고, 헌금이라는 제물을 들고 오며, 이런저런 기도 제목을 한가득 들고 와 하나님 앞에 바치려 합니다. 물론 이렇게 무언가를 들고 나오는 마음, 참으로 귀하고 아름답습니다. 봉사와 헌신과 기도, 성도가 하나님 앞에 드릴 수 있는 이보다 더 보배로운 것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러나 진짜 문제는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자신을 살피는 회개와 정돈은 전혀 없이, 오직 하나님께 드릴 제물만 잔뜩 준비해서 나오는 모습 말입니다. 이것은 마치 정성껏 음식은 차려 놓았는데, 정작 그 음식에 소금을 한 톨도 치지 않은 것과 같습니다. 아무런 맛도 낼 수 없습니다. 하나님 앞에 나아올 때 가장 먼저 이루어져야 할 일은, 내 마음과 삶을 하나님 말씀 앞에 조용히 비추어 보는 것입니다. 그런데 수많은 성도들이 자기 자신은 살피지 않은 채, 그저 이런 종교적인 행위만 바치면 하나님이 기뻐하실 것이라 착각하며 달려갑니다.
전도자는 이런 사람을 가리켜 단호하게 '우매자'라고 부릅니다. 여기서 우매자란 지능이 모자라거나 머리가 덜떨어진 사람을 뜻하는 게 아닙니다. 하나님 앞에 나오면서 자기 자신의 허물과 삶은 전혀 살피지 않은 채, 화려한 종교적 행위와 제물로 자기 자신을 덮어 버리려는 사람. 바로 그런 사람을 성경은 우매자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영적인 우매자들에게는 한 가지 분명한 공통점이 있습니다. 내가 무언가를 행함으로써 하나님의 호의를 내 마음대로 조종할 수 있다고 착각하는 것입니다. 내가 무슨 선행이라도 하면, 그 선행으로 하나님의 마음을 움직이고 조종해서 내가 원하는 것을 손에 쥐고 받아 낼 수 있다고 여깁니다. 여러분, 바로 그것을 '종교'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종교는 내가 무언가를 해서 하나님의 마음을 움직여, 내가 원하는 것을 받아 낼 수 있다고 믿는 것입니다. 그러나 '복음'은 전혀 다릅니다. 정반대입니다. 복음은 내가 무언가를 행하여 하나님으로부터 호의를 억지로 받아 내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이미 다 이루어 놓으신 그 일을, 내가 감사함과 믿음으로 그저 받아 누리는 것입니다. 독생자 아들까지 내어 주신 그 크신 사랑을 믿음으로 그저 받고, 그 받은 은혜와 사랑이 너무나 감사해서 내 안에서 저절로 터져 나오는 거룩한 반응으로 살아가는 것. 그것이 진짜 믿음입니다.
그러니 전도자는 지금 우리에게 이 진리를 선포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진정으로 행복하기를 원하십니까. 참된 행복은 행복의 원천이신 하나님을 내 뜻대로 조종해서 그분의 호의를 받아 내는 데 있지 않습니다. 오직 하나님을 두렵고 떨림으로 경외하는 데 달려 있습니다.
하나님을 내 마음대로 조종하려는 신앙과, 하나님을 거룩하게 경외하는 신앙. 바로 이 지점에서 진짜 기독교와 가짜 기독교가 명확하게 갈라집니다.
저는 오늘 선포한 이 사실이야말로, 참과 거짓을 가르는 너무나도 엄중한 시금석이라고 믿습니다. 지금 이 땅 위에 얼마나 수많은 가짜 기독교가 진짜 기독교의 탈을 쓰고 행세를 하고 있는지 모릅니다.
전도자는 이어서 이렇게 말합니다. 가까이 하여 말씀을 듣는 것이 우매한 자들이 제물 드리는 것보다 낫다고 말입니다. 제물을 잔뜩 드리는 것보다 하나님의 말씀을 가까이하는 삶. 그것이 하나님이 받으시는 훨씬 더 나은 제사입니다.
말씀은 우리 영혼을 비추는 거울입니다.
이 영혼의 거울 앞에 나를 가까이 세워 놓으면, 비로소 내 진짜 모습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평소 내가 쓰던 툭툭거리는 말투가 보이고, 내 날카로운 성격과 고집, 교만이 보입니다. 여태 까맣게 잊고 살았던 나의 엄청난 허물들이 비로소 드러납니다. 그래서 인간은 본능적으로 하나님의 말씀 앞에 가까이 서기를 꺼립니다. 말씀 앞에 서는 순간, 내 못난 모습과 부끄러운 실체가 그대로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늘 나를 그럴듯하게 포장하며 살아갑니다. 사실은 행복하지 않으면서도 SNS에는 맛있는 것을 먹는 척, 행복한 척 사진을 올립니다. 없으면서도 있는 척합니다. 성도들조차 행복하지 않으면 믿음 없는 사람으로 보일까 봐, 실제로는 심령이 바싹 말라가면서도 행복한 척 가면을 씁니다. 우리는 모두 가면을 쓰고 살아가는 데 길들여져 있습니다. 제가 오죽하면 몇 해 전에 '가면 무도회'라는 제목으로 설교까지 했겠습니까.

그러나 하나님 앞, 그분의 서슬 퍼런 말씀 앞에 바로 서면, 가공된 가짜 내가 아니라 진짜 내 실상이 드러납니다. 설교 말씀을 들을 때 마음이 찔리고 불편하고 부끄러운 마음이 드는 분이 계십니까. 그렇다면 그 사람은 진짜 은혜를 받은 사람입니다.
말씀 앞에서 느끼는 부끄러움은 내 영혼 안에 하나님의 거룩한 빛이 들어왔다는 증거입니다.
어두운 방 안에 빛이 들어오면 온갖 먼지가 다 드러나듯, 내 안의 어둠이 보이기 시작했다는 것은 내 심령에 빛이 임했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이런 내가 이렇게 먼지투성이, 진흙투성이였구나' 하고 자신의 허물을 솔직하게 나누는 것을 우리는 '간증'이라고 부릅니다.
우리는 흔히 예수 믿었더니 복 받았더라, 자식이 잘되었더라 하는 이야기를 간증이라고 착각합니다. 아닙니다. 진짜 간증은 따로 있습니다. "나는 그동안 제법 괜찮은 사람인 줄 알고 살아왔는데, 하나님을 진짜로 만나고 보니 이렇게 지저분하고 악한 죄인이었습니다." 바로 이렇게 자기의 참된 실체를 고백하는 것이 진짜 간증입니다. 예수 믿고 잘되었다는 자랑으로 남의 속을 뒤집지 마십시오. 사람들은 남 잘되었다는 자랑에 관심이 없습니다.
제가 간혹 성도들에게 "집사님, 하나님 말씀 좀 가까이 하십시오. 그게 정말 중요합니다" 하고 권하면, 이렇게 대답하는 분들이 계십니다. "목사님, 저도 말씀 가까이 해야 하는 줄 잘 압니다. 그런데 제가 요즘 너무 바빠서 그럴 시간이 없습니다."
여러분, 이 대답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한마디로 비겁한 변명입니다. 사람은 아무리 바빠도, 정말 중요하다고 여기는 일은 무슨 수를 써서라도 반드시 해냅니다. 이 일을 하지 않으면 안 된다 싶은 일은 어떻게든 해내고, 아무리 바빠도 반드시 만나야 할 사람은 기어이 만납니다.
저는 여러분에게 자주 말씀드립니다. 주일 설교 한 편을 준비하는 데 서른 시간쯤 쏟아붓는다고 말입니다. 그런데 요즘은 나이가 들어 머리가 예전 같지 않아서 그런지 시간이 더 늘어났습니다. 이제는 마흔 시간은 족히 바쳐야 설교 한 편이 겨우 준비되는 것 같습니다. 그럼에도 아무리 바쁜 일이 몰려와도, 저는 일주일 중에서 그 삼사십 시간을 기어이 끄집어내어 설교 준비에 쏟아붓습니다.
저는 무슨 일이 있어도, 혹여 쓰러지더라도 교회에 와서 쓰러집니다. 왜 그렇겠습니까. 목사이기 때문입니다. 나 자신보다 이 일이 더 중요하고 소중하다고 믿기 때문에, 쓰러지더라도 주님의 제단 앞에 와서 말씀을 전하다 쓰러지려는 것입니다.
바쁘다는 말은 결코 시간의 문제가 아닙니다. 바로 우선순위의 문제일 뿐입니다. 누군가에게 "제가 너무 바빠서 만날 시간이 없습니다" 하고 말하는 것은, 사실 "당신은 그 일보다 나에게 중요한 사람이 아닙니다"라는 뜻입니다. 참으로 중요한 사람은 어떻게든 시간을 내어 만나는 법입니다.
운전 중에 원치 않는 영업 전화가 걸려 오면 우리는 보통 "운전 중입니다" 하고 차갑게 끊어 버립니다. 그런데 정말 소중히 여기는 사람에게서 전화가 오면 어떻게 합니까. 상대방이 "운전 중이시네요. 나중에 다시 통화하시죠" 하고 배려하면, 오히려 우리가 이렇게 붙잡습니다. "아닙니다. 블루투스로 다 연결되어 있으니 아무 상관없습니다. 편하게 말씀하시지요."
모든 것은 환경과 여건의 문제가 아닙니다. 오직 관계의 문제입니다.
저는 우리 중에 하나님을 만나지 못할 만큼 바쁜 사람은 단 한 명도 없다고 믿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만날 수 없을 만큼 바쁜 존재가 아닙니다. 그저 하나님 없이도 얼마든지 잘 살 수 있다고 착각할 만큼, 이 죄악 된 세상에 너무나 익숙해져 버린 존재일 뿐입니다.
그러므로 참된 영성은 한가한 여유에서 시작되지 않습니다. 시간이 남아돌고 형편이 넉넉해서 시작되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영성은 '아, 나는 하나님이 없으면 한 순간도 안 되겠다'는 거룩한 깨달음에서 시작됩니다. 내 인생에 하나님 없이는 도무지 살아갈 수 없다는 바로 그 가난한 심령의 자리가 영성의 출발점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남는 시간을 기다리시는 분이 아닙니다. 하나님 없이는 살 수 없다는 우리의 진실하고 갈급한 목마름을 기다리시는 분입니다.
솔로몬의 행복학교에 들어서면 이런 표어가 걸려 있습니다.
행복은 시간이 남을 때 잠깐 놀러 오는 손님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가까이할 때 우리 안에 들어와 머무는 거룩한 선물입니다.
내가 가까이하는 것이 곧 나를 만든다는 말이 있습니다. 지금 여러분의 모습은, 그동안 여러분이 가까이해 온 것들의 결정체요 총합입니다. 늘 성경 말씀을 가까이한 사람과 돈만을 가까이한 사람은, 가만히 만나 보면 삶에서 풍기는 향기부터가 완전히 다릅니다. 매일 튀김과 인스턴트 라면을 가까이하는 사람과 몸에 좋은 채소를 가까이하는 사람은 얼굴빛 자체가 다릅니다. 심지어 가정에서 날마다 인격을 무시당하고 상처를 받으며 사는 아내와, 남편에게 깊이 존중받고 사랑받으며 사는 아내에게서 나오는 삶의 결은 전혀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내가 가까이하는 것이 곧 나 자신입니다. 그러니 무엇을 내 삶 곁에 두느냐에 따라 인생의 행복과 불행이 완전히 갈라집니다. 그런데 우리의 영혼을 참되게 빚어내고 살려내는 것이 과연 무엇이겠습니까. 바로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내가 가까이하는 것이 곧 나를 만든다는 이 진리를 결코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솔로몬은 이어서 뜻밖의 선포를 합니다.
전도서 5:88너는 어느 지방에서든지 빈민을 학대하는 것과 정의와 공의를 짓밟는 것을 볼지라도 그것을 이상히 여기지 말라 높은 자는 더 높은 자가 감찰하고 또 그들보다 더 높은 자들도 있음이니라
이 말씀을 읽으면 이상하지 않습니까. 가난한 자가 학대당하고 정의와 공의가 처참하게 짓밟히는 광경을 보면, 마땅히 분노하고 울부짖어야 할 것 같습니다. 그런데 전도자는 그것을 보고도 이상히 여기지 말라고 말합니다. 저 역시 이 이해할 수 없는 말씀 앞에 한참을 서서 묵상해보았습니다.
제가 여러분에게 드리고 싶은 말씀은 바로 이것입니다. 여러분이 아무리 바라고 기대하며 부르짖어 기도해도, 이 타락한 세상은 여러분의 뜻대로 되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우리가 아무리 통곡하며 기도해도 이 세상에서 전쟁은 사라지지 않습니다. 가난도 사라지지 않습니다. 힘 있는 자가 힘없는 자를 누르는 잔인한 폭력도, 세상의 불공평과 불공정도 결코 사라지지 않습니다. 그러니 세상을 살아가면서 "세상이 왜 이 모양인가, 세상이 어쩌자고 이렇게까지 돌아가는가" 하며 한탄하지 마십시오. 전도자가 단호하게 이상히 여기지 말라고 선포하지 않습니까.
"세상이 왜 이 모양인가" 하는 탄식은 성도가 내뱉을 말이 아닙니다. 세상은 단 한 번도 온전했던 적이 없습니다. 언제나 세상은 그랬습니다. 세상은 원래 악하고 병든 곳인데, 세상이 그렇지 않아야 한다고 한가하게 우기니까 우리 마음의 고통과 절망이 커지는 것입니다. 우리가 아무리 애를 써도 이 세상은 본래 이런 곳이라는 이 엄연한 사실을, 우리는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우리는 사회에서 일어나는 어떤 불의한 일을 볼 때 혀를 차며 이렇게 말할 때가 있습니다. "어떻게 저럴 수가 있어? 이건 도무지 있을 수 없는 일이야." 그런데 이 말 안에는 어떤 전제가 숨어 있는지 아십니까. '나는 저 일과 아무 상관이 없다, 나는 아무 책임이 없다'는 오만한 전제입니다. 그렇게 말하는 순간, 우리는 타인을 고발하는 동시에 자기 자신을 높다란 판사석 위에 앉히는 꼴이 되고 맙니다.
요즘 우리 사회가 사법개혁을 외칩니다. 그러나 제가 보기에는 우리 국민 오천만 명이 다 판사석에 앉아 있는 것 같습니다. 대통령도 손쉽게 판단하고, 세상 모든 일을 다 손가락질하며 판단합니다. 우리는 모두 타인을 판단하는 데에 둘째 가라면 서러울 전문가들입니다.
'내로남불'이라는 유명한 말이 있습니다. 내가 하면 로맨스고, 남이 하면 불륜이라는 뜻입니다. 저는 이 말이야말로 인간의 지독한 타락과 본성을 완벽하게 표현한 말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 모두는 크고 작은 내로남불쟁이들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전혀 다르게 말합니다.
이 세상에 일어나는 모든 고통과 모순에는, 바로 나의 지분이 담겨 있습니다.
내가 도대체 무슨 죄를 지었느냐고 반문하고 싶으실 것입니다. 그러나 이 세상에서 벌어지는 악과 비극을 깊이 추적해 보면, 그 모든 모순과 고통의 한복판에 우리의 지분이 또렷이 담겨 있음을 깨닫게 됩니다. 그래서 다니엘 같은 거룩한 선각자는, 자신이 직접 짓지도 않은 민족의 죄를 짊어지고 하나님 앞에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우리가 범죄하였습니다." 평생 남을 섬기고 사랑만 베풀었던 그 하나님의 사람이, "저 악한 자들이 범죄하였습니다"가 아니라 "우리가 범죄하였습니다" 하고 눈물로 기도한 것입니다.
저는 이것을 '지분 의식'이라고 부릅니다. 정말 깊은 영성을 가진 성도는, 나와 아무 상관없어 보이는 세상의 아픔 속에서도 자신의 지분을 느끼며 통회합니다.
여러분 가운데 사람을 직접 죽여 본 분이 계십니까. 다들 없다고 손사래를 치실 것입니다. 그러나 지난 코로나 시절을 가만히 돌이켜 보십시오. 나도 모르는 사이에 코로나에 걸려 누군가에게 바이러스를 옮긴 적은 없습니까. 우리는 아는 이들뿐만 아니라, 길에서 스쳐 지나간 무수한 사람들에게도 호흡을 통해 병을 옮겼을 것입니다. 그 균이 옮고 또 옮겨가며 통증을 겪었을 텐데, 그 순환의 끝에서 세상을 떠난 사람이 정말 단 한 명도 없었다고 장담할 수 있겠습니까. 어쩌면 우리는 먼 훗날 천국에 가서, 누군가 달려와 "당신이 옮긴 그 균 때문에 제가 죽었습니다" 하고 말하는 비극을 만나게 될지도 모릅니다. 저희 병원만 보더라도 환자들에게 균을 옮기는 것은 대개 바깥을 오가는 직원들입니다. 치료하는 사람이 도리어 환자를 사망으로 몰아가기도 하는 것, 그것이 이 타락한 세상에 흐르는 비참한 질서의 한 자락입니다.
우리가 날마다 먹다 버리는 음식이 얼마나 많습니까. 장롱 속에 입지 않고 쌓아 둔 옷, 신지 않는 신발, 다 쓰지도 못하고 쥐고 있는 재물들. 이 모든 것들은 우리가 인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누군가의 처절한 결핍에 동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자본주의라는 구조는 누군가가 과도하게 가지면, 반드시 다른 누군가는 가지지 못해 울어야 하는 구조입니다. 내 아파트값이 치솟아 올라갈 때, 누군가는 그 오른 집값을 쳐다보지도 못한 채 절망하는 결핍을 겪습니다. 우리가 바로 그런 죄악 된 구조 속에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 세상의 수많은 모순과 부조리를 바라보면서 "아, 저 참혹한 일 안에도 나의 지분이 들어있겠구나" 하고 바라볼 수 있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우리는 결코 누군가를 함부로 손가락질하고 정죄하며, 스스로 판사석에 앉아 하나님 노릇을 하지 못할 것입니다. 성경은 우리 모두를 죄인이라 부릅니다. 다 치료받아야 할 환자라고 선언하며, 이 세상의 아픔과 탄식에 우리 모두가 조금씩은 다 보태었다고 증언합니다.
내 지분이 있다는 이 엄연한 사실을 깨달을 때, 비로소 이웃을 바라보는 우리의 눈빛이 조금은 더 따뜻해지지 않겠습니까.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이 조금은 덜 비판적이고 겸손해지지 않겠습니까. 저는 예수님이 말씀하신 "심령이 가난한 자가 복이 있다"는 선포가 바로 이것을 의미한다고 믿습니다. "하나님, 저는 하나님 앞에 입이 백 개라도 할 말이 없는 죄인입니다. 내가 그토록 한심하게 보던 저 사람이, 나처럼 좋은 부모를 만나고 훌륭한 환경에서 자랐다면 나보다 훨씬 성숙한 사람이 되었을 것입니다." 이렇게 나를 낮추고 남을 바라봐 주는 겸손한 영성, 이것이 바로 심령이 가난한 자의 참된 모습입니다.
솔로몬의 행복학 강좌는 이제 물질과 풍요의 문제로 향합니다.
전도서 5:1010은을 사랑하는 자는 은으로 만족하지 못하고 풍요를 사랑하는 자는 소득으로 만족하지 아니하나니 이것도 헛되도다
오늘날 우리 한국 사회가 먹을 것이 없어서 고통받는 사회입니까. 제가 어릴 때만 해도 어머니가 쌀독을 긁는 소리를 들으며 자랐습니다. 그때는 먹고사는 일이 인생 전체의 문제였던 시대였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쌀이 떨어져 내일 자식들 먹일 일이 아득해 잠 못 이루는 부모는 별로 없습니다. 생존 그 자체 때문에 밤잠을 설치는 사람은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그런데도 왜 이렇게 많은 사람이 고통스러워하며 잠을 이루지 못합니까. 솔로몬이 인생을 꿰뚫어 본 것처럼 저 역시 가만히 들여다보니, 그것은 결코 생존의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남과의 비교, 그리고 한도 끝도 없는 욕망이 만들어 낸 불안 때문이었습니다. 솔로몬은 선포합니다. 은을 사랑하는 자는 은으로 결코 만족하지 못한다고 말입니다.
은이 무엇입니까. 바로 '기호품'입니다. 기호품이란 있으면 좋지만, 없어도 사는 데 아무런 지장이 없는 것입니다. 은이 있으면 좋습니다. 그러나 은이 없다고 우리가 당장 죽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그런데 오늘을 사는 수많은 사람들은 없어도 그만인 이 기호품 때문에 스스로 불행을 자초하며 살아갑니다.
여러분, 밤마다 여러분을 불안하게 하고 잠 못 이루게 하는 것이 정말 내일 입을 옷이 없어서입니까. 냉장고에 먹을 것이 단 하나도 없어서입니까. 전혀 아닙니다. 우리는 거처할 집이 없어서 불행한 것이 아닙니다. 남들의 더 크고 비싼 집을 기준으로 삼기 때문에 불행한 것입니다. 차가 없어서 불행한 것이 아니라, 남들처럼 고급 차를 타고 싶은데 내 차가 초라해 보이니 스스로 불행 속으로 걸어 들어가는 것입니다.
요즘 청년들을 두고 일자리가 없어서 불쌍하다고들 말합니다. 그러나 정확히 말하면 일자리가 없는 것이 아닙니다. 당장 현장이나 주방, 간병하는 자리에는 일할 사람을 구하지 못해 난리입니다. 일자리가 없어서 불행한 것이 아니라, 오직 남들에게 내세울 만한 번듯한 일자리만 진짜 일자리라고 여기기 때문에 불행한 것입니다. 우리가 불행한 이유는 삶의 필수품이 모자라서가 아닙니다. 기호품에 온 영혼을 빼앗겼기 때문입니다.
기호품은 잠깐의 편리함과 기쁨을 줄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행복의 절대적인 기준으로 삼는 순간, 하나님이 주시는 참된 평안은 한순간에 산산조각 납니다. 이것이 전도자 코헬렛의 엄중한 경고입니다. 손으로 바람을 잡으려는 것처럼 헛되고 허망한 짓인데, 온 인생이 그 유령 같은 바람을 잡겠다고 피 흘리며 달려가고 있으니 제발 정신을 차리라는 선포입니다.
저는 예전에 애플을 창업한 스티브 잡스가 세상을 떠나기 직전에 남겼다고 전해지는 글을 자료 삼아 적어 둔 적이 있습니다. 그 글은 이렇게 증언합니다.
"병석에 누워 지난 삶을 가만히 돌아보니, 그토록 자랑스러워하던 세상의 갈채와 막대한 부가 임박한 죽음 앞에서는 모두 빛을 잃고 아무런 의미도 남지 않았다. 이제야 비로소 깨닫는 것은, 평생 굶지 않을 정도의 부만 쌓고 나면 그 이후에는 돈 버는 일과 상관없는 참된 가치에 관심을 두어야 했다는 사실이다. 그것은 따뜻한 인간관계일 수도 있고, 예술일 수도 있으며, 어린 시절 가슴에 품었던 아름다운 꿈일 수도 있다. 쉬지 않고 오직 돈 버는 일에만 몰두하다 보면, 결국 나처럼 비뚤어진 괴물이 되고 만다. 내가 평생 모은 그 어떤 재산도 저 세상으로 가져갈 수는 없다. 가져갈 수 있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오직 사랑으로 채워진 소중한 추억뿐이다."
저는 이 글을 읽으면서 깊은 탄식과 함께 깜짝 놀랐습니다. 죽음을 눈앞에 둔 한 인간의 처절한 회한이, 삼천 년 전 전도서가 선포하는 진리와 어쩌면 이렇게 한 치도 다르지 않습니까. 은을 사랑하는 자는 은으로 결코 만족하지 못한다는 하나님의 말씀 그대로입니다.
그렇다면 허무에 굴복하는 이 세상의 질서 속에서, 우리 그리스도인은 과연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될 대로 되라며 허무한 운명론에 인생을 내던지고 살아야 합니까. 솔로몬의 행복학 강좌가 다루는 핵심이 바로 이 물음에 대한 답입니다. 전도자는 본문의 마지막에 이르러 이렇게 명확한 답을 제시합니다.
전도서 5:18-1918사람이 하나님께서 그에게 주신 바 그 일평생에 먹고 마시며 해 아래에서 하는 모든 수고 중에서 낙을 보는 것이 선하고 아름다움을 내가 보았나니 그것이 그의 몫이로다
19또한 어떤 사람에게든지 하나님이 재물과 부요를 그에게 주사 능히 누리게 하시며 제 몫을 받아 수고함으로 즐거워하게 하신 것은 하나님의 선물이라
잘 들어 보십시오. 성경은 분명히 '어떤 사람에게든지'라고 말씀합니다. 단 한 사람도 빠짐없이, 하나님은 모든 이에게 각자의 재물과 부요를 나누어 주셨습니다. 분량과 양은 저마다 다를지라도, 주시기는 이미 다 주셨습니다.
그런데 이 말씀의 진짜 핵심은 재물과 부요라는 단어 자체에 있지 않습니다. 우리는 늘 돈, 돈 하며 살아가기에 이 구절을 읽으면서도 오직 재물과 부요만 눈에 담습니다. "하나님, 재물과 부요를 주실 줄 믿습니다" 하고 부르짖지만, 정작 성경이 말하는 진짜 핵심은 그 뒤에 숨어 있습니다. 바로 '능히 누리게 하시며'라는 선포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참된 행복을 주시는 통로는 단순한 재물의 양에 있지 않습니다. 그것을 '능히 누리게 하시는 은혜'에 달려 있습니다.
행복은 남이 가지지 못한 많은 것을 내 손에 쥐는 데 있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오늘'이라는 보자기 속에 담아 보내 주신 소중한 선물을, 기쁨으로 뜯어서 누리는 데 있습니다. 그러므로 기독교의 참된 영성은 더 많이 가지는 힘이 아니라, 이미 주신 것을 더 깊이 누리는 힘입니다. 거창하고 특별한 체험을 추구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늘 나에게 주어진 삶을 온전히 누릴 줄 아는 거룩한 능력입니다.
우리가 지금 거저 쉬고 있는 이 호흡, 이 산소도 사실 병원에서 값을 매기면 십 분에 오십만 원이랍니다. 그런데 우리는 날마다 이 풍성한 공기를 마음껏 마시면서도 감사할 줄을 모릅니다. 제가 좋아하는 어느 작가가 히말라야에 올랐다가 고산병으로 쓰러져 앰뷸런스에 실려 내려왔습니다. 그런데 그분이 이렇게 말하더랍니다. "산소가 이렇게 맛있는 줄 난생처음 알았습니다." 매일 거저 누릴 때는 그 가치를 몰랐다가, 잃어버릴 위기에 처해서야 비로소 깨달은 것입니다.
아침에 눈을 뜰 때 오늘 하루도 주님이 나와 함께하신다는 가슴 뛰는 설렘. 출근길에 얼굴을 스치는 바람에서 느껴지는 하나님의 다정한 손길. 병원 뒤뜰에서 잠시 기도할 때 들려오는 새소리 속의 창조의 숨결. 밥 한 숟가락을 뜨면서 그 밥알 하나에 담긴 햇살까지 함께 삼키는 영적 시선. 바로 이것이 누림입니다. 얼마 전 새벽에는 구름이 회오리처럼 지나가는 장관을 보고 아내를 불렀습니다. 같이 보자고, 같이 하나님을 누리자고 말입니다. 오늘을 누리지 않는다면 우리는 대체 어디서 영성을 발견하겠습니까. 아무리 통장에 돈이 쌓여 있어도 누릴 줄 모르면, 그 돈은 그저 차가운 숫자에 불과합니다.
운동선수들 사이에 이런 유명한 격언이 있지 않습니까. '노력하는 선수는 즐기는 선수를 절대 이길 수 없다.' 이 법칙은 신앙의 영역에서도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그대로 적용됩니다. 오늘날 교회 안에는 신앙생활을 잘해 보려고 안간힘을 쓰며 애쓰는 성도들이 참 많습니다. 읽기 싫어도 억지로 성경을 읽으려 하고, 기도 분량을 채우기 위해 억지로 무릎을 꿇으며, 저 집사님에게 뒤처지지 않으려고 봉사합니다. 저는 이 순수한 마음을 조금도 폄하하지 않습니다. 참으로 아름답고 귀한 일입니다.
그러나 내가 무언가를 잘해 내야 한다는 자의식에서 신앙이 출발하면, 인간은 어느 순간 반드시 탈진하고 맙니다. 지쳐 버리면 기쁨은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오직 종교적인 의무감과 씁쓸한 경쟁만 남습니다. 봉사조차 교만한 경쟁이 되어 버리는 것입니다. 반면에 하나님을 깊이 누리는 데서 흘러나오는 신앙은 근본적인 에너지가 다릅니다. 내 힘과 의지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기에 언제나 자유롭습니다. 해도 기쁘고, 혹여 사정이 있어 못 해도 하나님 안에서 평안합니다. 그것이 바로 참된 누림입니다. 그런 성도를 향해 사람들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나는 저분과 함께 있고 싶어요. 저분 곁에 있으면 마음이 참 평안하고 좋습니다."
오늘 우리 교회가 스물두 번째 생일을 맞이합니다. 번듯한 예배당 건물 하나 없는 교회가 스물두 해의 시간을 이어온 것 자체가, 저에게는 참으로 하나님의 은혜요 기적처럼 느껴집니다. 이 스물두 돌의 뜻깊은 날을 맞이하면서, 저는 과연 하나님이 바라는 교회의 모습, 주님이 기뻐하시는 성도의 모습은 어떤 것일까 깊이 묵상해 보았습니다.
저는 우리 교회 안에 전도왕, 기도왕, 봉사왕 같은 화려한 직함이 우글거리기를 바라지 않습니다. 그런 타이틀보다, 저는 여러분 한 사람 한 사람이 진정 이런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러니 여러분의 신앙을 점검할 때에도, 내가 전도를 얼마나 열심히 했는가, 봉사를 얼마나 많이 했는가, 기도를 하루에 몇 시간이나 하는 사람인가에만 온 마음을 빼앗기지 마십시오. 대신 나 자신을 향해 이렇게 물어보시기 바랍니다. '나는 누군가에게 함께 있고 싶은 따뜻한 사람인가.' '누군가 허기진 밥을 먹을 때 문득 떠올라 같이 식사하고 싶어지는 사람인가.' '험한 선교를 떠날 때 기꺼이 동행하고 싶어지는 사람인가.' 이 질문들 앞에 여러분의 영혼을 비추어 보십시오.
그 신앙의 잣대는 가장 가까운 자리에서 판가름이 납니다. 바로 여러분의 가장 가까운 배우자입니다. 여러분의 남편이나 아내 입에서 "나는 당신과 함께 있고 싶어요. 당신 곁에 있을 때가 가장 행복합니다"라는 진솔한 고백이 나오지 않는다면, 아무리 열정적인 믿음을 가졌다 한들 저는 그 신앙을 그리 높게 평가하지 않습니다. 제가 목회하면서 여러분에게 헌금 더 내라, 봉사 더 해라, 전도 좀 하라고 강요해 본 기억이 별로 없습니다. 그러나 여러분을 만날 때마다, 여러분을 위해 제단 앞에서 기도할 때마다 백 번 천 번 꼭 해 주고 싶은 말은 분명히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누군가에게 함께 있고 싶은 사람이 되십시오. 그 곁에 가만히 머물고 싶은 따뜻한 사람이 되십시오.
이 설교를 준비하며 홀로 하나님 앞에 엎드려 묵상하다가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우리가 언젠가 세상을 다 지나쳐 하나님 영광의 보좌 앞에 서게 될 텐데, 그 거룩한 날 하나님은 과연 우리에게 무엇을 물으실까 하는 생각입니다.
저는 하나님께서 "너 세상에서 전도왕이었느냐. 기도는 몇 시간이나 하다 왔느냐. 봉사는 얼마나 엄청나게 했느냐" 하고 깐깐하게 물으실 것 같지는 않았습니다. 오히려 아주 낮고 따뜻한 음성으로 이렇게 물으실 것만 같았습니다.
목사인 저에게도 "너는 성도들이 진정으로 곁에 있고 싶어 했던 목사였느냐. 네 아내와 자식들이 네가 곁에 있는 것을 그 무엇보다 좋아하더냐" 하고 물으실 것 같았습니다. 저는 주님 앞에 서는 날, 우리 성도들 모두가 이 질문 앞에서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고 "주님, 주님께서 다 아시잖아요" 하고 활짝 웃으며 대답할 수 있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우리는 늘 십자가, 십자가를 외치면서도, 정작 자기 혼자 예수님이라도 된 것처럼 온 세상의 짐을 다 짊어진 듯 착각 속에 살 때가 참 많습니다. 그러나 십자가의 은혜를 깊이 통과한 진짜 신앙인이 어떤 사람인가 곰곰이 생각해보니, 결국 누군가가 함께 있고 싶어 하는 사람, 그 곁에 편안히 머물고 싶어 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저는 우리 교회가 세상이나 다른 교회들에게 거창하게 인정받는 교회이기보다, 오직 주님의 따뜻함으로 기억되는 교회이기를 원합니다. 선교 많이 하고 봉사 많이 해서 세상에 크게 기여했다고 자랑하는 교회이기보다, 성도와 이웃들이 함께 있고 싶어 하는 교회, 그 곁에 머물고 싶은 따뜻한 이불 같은 교회이기를 바랍니다. 무언가를 열정적으로 행함으로써 하나님께 호의를 받아 내려는 피곤한 종교인이 아니라, 하나님의 자녀로서 오늘을 누리며 살아가는 사람들. 성도이기 전에 먼저 따뜻하고 진실한 인간이 되는 사람들. 누구에게나 그 곁에 머물고 싶은 사람이 되는 은혜가 우리 모두에게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